분류 전체보기 (465) 썸네일형 리스트형 미숫가루에 아시아 역사가? / 5천원권 별명이 서양 율곡? 미숫가루, 아시아의 역사가 담겼다고? 찹쌀이나 맵쌀 또는 보리쌀 따위를 찌거나 볶아서 가루로 만든 식품인 미숫가루는 중동부터 동아시아까지 거의 모든 아시아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전투 식량이나 여행용, 수련용 음식으로 애용되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처음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선식(禪食)이라고도 불리며 예로부터 신선들이 먹던 음식이라고도 알려졌다. 그리고 중원의 고대 국가인 주나라 초기인 기원전 12세기 이전부터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미식'이라 불리며 먹었다고 추정되며 미식이 미수로, 다시 미숫가루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고려시대에 몽골로 건너간 뒤, 몽골 전통 음식 중 하나인 '미스가라'라는 음식으로 변형되었다고 여겨진다.. 쥐잡기가 토종 여우 멸종시켜? / 오줌을 사고 팔았다고?/덴푸라 유래 1960년대 우리나라 쥐잡기 운동이 토종 여우를 멸종시켰다고? 우리나라 전설이나 민담에는 여우가 자주 등장한다. 여우는 산속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 있는 구릉이나 야산에 살고, 저녁 무렵 활발히 움직이는 쥐를 잡아먹고 산다. 게다가 한반도 전역에 사는 토종 여우의 개체 수가 상당했다. 당연히 사람의 눈에 자주 띄었고 민담의 소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전국 곳곳에 살았다던 여우가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1960년대 대대적으로 펼친 쥐잡기 운동이 원인이다. 1962년 쥐잡기용 국가 예산 8억 2000만 환이 책정돼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쥐덫도 보급하고 고양이를 기르자는 캠페인도 벌였다.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 는 구호 아래 1970년대에는 1년에 수차례 같은 시간에 일제히.. 퐁듀는 나치에 저항한 음식?/초밥10개가 1인분인 이유 스위스의 퐁듀는 나치에 저항하기 위해 먹던 음식이라고?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스위스까지 넘봤다. 하지만 스위스는 독일의 공격을 잘 막아내 1815년 비엔나회의에서부터 유지한 중립국 지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작은 나라인 스위스가 독일 침략을 잘 막아냈던 것은 오로지 국민들의 단결된 힘이었다. 스위스는 정규군이 없고 민병대만 있었다.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군대로 소집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정부가 국민 동원령을 내려 징집 대상자 거의 전부인 40만 병력이 일주일 만에 모였다. 이들이 똘똘 뭉쳐 결사 항전했다. 그런데 이때 스위스 전통 음식이었던 퐁듀(Fondue)가 크게 인기를 끌었다. 오래전 알프스의 목동들이 겨울 추위에 맞서 먹었던 음식이 퐁듀였다. 포도주를.. 나치의 비밀무기는 위조화폐? / 2차 대전 때 덩어리 빵만 먹은 미국인들 독일 나치의 비밀 무기는 위조화폐?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는 위조화폐로 작전을 짰다. 친위대의 베른하르트 크루거 소령은 영국과 미국 경제를 붕괴시키키 위한 위조화폐 제조의 총책이 되었으며, 이 작전은 '베른하르트 작전'으로 불렸다. 1942년부터 그는 142명의 부하와 함께 작전을 펼쳤고 1945년에는 1억 3000만 파운드 상당의 지폐를 찍어냈다. 위조화폐 일부는 독일 요원들의 활동비로 지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5년 5월 미군의 끈질긴 추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영국 상공에서 위조화폐를 공중투하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위조화폐 대부분은 오스트리아 애벤씨에 있는 토플리츠 연못에 숨겼다. 이후 1959년 한 잠수부가 연못에서 위조화폐 더미를 발견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밝.. 1차 세계대전 승리자는 인스턴트 커피?/ 전쟁의 빚더미에 앉혀진 독일 1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는 인스턴트 커피? 미국인들은 일찌감치 커피 맛에 매혹되었다. 1860~1865년 벌어진 남북전쟁 중에도 군인들까지 커피를 매일같이 마셨을 정도다. 남북전쟁은 노예 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와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 사이에 일어난 내전으로, 북군은 중남미와 유럽을 통해 들여온 품질 좋은 원두 공급이 원활했고 이에 비해 남군은 해안을 봉쇄당해 원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때론 남군 측에서 휴전을 요청한 다음, 가지고 있는 물자를 커피로 교환해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는 커피를 마시려면 원두를 로스팅해 분쇄해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려야 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매번 이런 방법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은 무척 번거로웠다. 그래서 북군은 커피를 만들어 연유를 섞어 진하게 농.. 손목시계와 보어전쟁/바나나회사가 문어?/알카포네가 세탁소 주인? 손목시계와 보어전쟁 유럽에서 19세기까지 손목시계는 여성 전유물이었다. 유럽 왕실들의 여성 귀족을 중심으로 리슬릿(wristlet)이라 불리는 팔찌 형태의 손목시계가 장신구로 인기를 끌었다. 이 시계에는 각종 보석과 아름다운 문양을 새기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남성은 주로 회중시계를 착용했고, 남녀 구분이 확실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손목시계 착용은 남성에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던 금기가 보어전쟁을 계기로 깨진다. 보어전쟁(1899~1902)은 영국이 남아프리카 일대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두 차례에 걸쳐 치른 전쟁이다. 이 전쟁은 철조망과 기관총, 수류탄 등 현대전 무기들이 처음으로 대량 활용된 본격적인 현대전으로 알려졌다. 약 3만 명의 주민들이 학살된 이 끔찍한 전쟁에서 남성들은 .. 인천 차이나타운이 사교와 유흥의 장소였다고? 우리나라에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882년부터다.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군대(별기군)와의 차별대우와 민씨 일족의 전횡 등에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청나라 군대 4,000여 명이 인천을 거쳐 서울 용산에 주둔했다. 이때 군대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기 위해 40여 명의 군역 상인도 함께 들어와 부대 인근에 자리 잡은 것이 우리나라 차이나타운의 기원이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한 다음 해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狀租界章程)이 체결돼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약 1만 7,000㎟ 대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들어섰다. 이때부터 인천 선린동 일대에 중국인들이 문을 연 요릿집이 생겨났다. 요즘에도 중국요리 식당으.. 새똥 때문에 전쟁한 나라들/보험의 원조, 비스마르크/커피가 서양 한약? 새똥 때문에 전쟁을 벌인 나라들 새똥은 한때 전쟁 원인이 되기도 했다. 페루에서 구아노(Guano)라고 불리는 새똥은 질소와 인산 등 영양분이 많이 들어있는 천연 비료로 이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 몇 차례나 있었다. 식물이 광합성을 하려면 땅속의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성분이 질소다. 식물은 뿌리를 통해 땅에서 질소를 받아들여 세포와 조직을 만든다. 왜 구아노에는 영양분이 많이 들어 있을까? 이유는 이렇다. 페루 해안 쪽의 바다에는 남극에서 페루 북쪽으로 흐르는 찬 해류가 바다 밑의 영양분들을 뒤집어 올려서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플랑크톤이 많으니 물고기도 많고, 새도 많다. 그렇게 페루 해안에는 새가 몰리면서 새똥이 해안 절벽에 수천에서 수만 년간 쌓였고 수십 미터에서 수백 미터에 이.. 가발이 사치품? /유럽인은 왜 가발을 썼을까? /중절모 유행의 기원 조선 시대 여성들에게 최고 사치품이 가발이었다고? 조선 시대 여성에게 최고 사치품은 바로 가체였다. 가체는 요즘말로 하면 가발인데, 정확히는 머리카락에 덧붙이는 장식 역할을 했다. 당시 여성들은 머리에 가체를 얹어 머리카락을 더욱 풍성하게 보이도록 했다. 처음엔 왕실과 상류층만 가체를 사용했다. 당시 기술로는 진짜 사람 머리카락으로만 제작되었기에 아주 비쌌다. 특히 조선 시대는 예의범절상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르지 않았던 시기라서 가체 자체가 무척 귀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가 되자 서민도 가체를 즐겨 착용하기 시작했다.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서민의 경제력이 커져서였다. 가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기록을 보면 영조(1694~1776) 때 쌀 한 가마의 값이 3냥이었는데 가체는.. 감자가 악마의 식물?/감자대왕이라 불린 왕/튤립 한송이가 집 한채 값? 감자가 300년 동안 악마의 식물이었다고? 각종 요리에 사용되는 감자는 현대인의 필수 식자재 가운데 하나다. 감자의 고향은 수백 종의 야생 감자가 자라는 안데스 산맥의 고원이다. 이곳을 정복한 에스파냐인들은 16세기 후반 감자를 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으로 가져갔다. 감자를 처음 본 유럽인들은 감자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쁜 식물로 여겼다. 그때의 감자는 오늘날과는 달리 알이 작고 표면이 울퉁불퉁했으며 잘라두면 흰 살빛이 곧 검게 변했다. 쓴맛이 났고 혀를 자극하는 독( 훗날 '솔라닌'이라는 성분으로 밝혀짐)이 있었다. 이것이 나병을 연상시켰는지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헛소문까지 돌았다. 프랑스 동부의 브르고뉴 지방에서는 공식적으로 감자 식용이 금지될 정도였다. 종교적인 편견도 영향을..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 4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