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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 상식

감자가 악마의 식물?/감자대왕이라 불린 왕/튤립 한송이가 집 한채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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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가 300년 동안 악마의 식물이었다고?

각종 요리에 사용되는 감자는 현대인의 필수 식자재 가운데 하나다. 감자의 고향은 수백 종의 야생 감자가 자라는 안데스 산맥의 고원이다. 이곳을 정복한 에스파냐인들은 16세기 후반 감자를 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으로 가져갔다.

 감자를 처음 본 유럽인들은 감자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쁜 식물로 여겼다. 그때의 감자는 오늘날과는 달리 알이 작고 표면이 울퉁불퉁했으며 잘라두면 흰 살빛이 곧 검게 변했다. 쓴맛이 났고 혀를 자극하는 독( 훗날 '솔라닌'이라는 성분으로 밝혀짐)이 있었다. 이것이 나병을 연상시켰는지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헛소문까지 돌았다. 프랑스 동부의 브르고뉴 지방에서는 공식적으로 감자 식용이 금지될 정도였다.

고흐 作  감자 먹는 사람

 종교적인 편견도 영향을 미쳤다. 성경 창세기에는 먹어도 되는 식품과 먹어서는 안되는 식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감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중세 이래 유럽인은 땅을 지옥, 지상을 연옥, 하늘을 천국으로 여기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동식물의 가치도 이에 따라 평가하곤 했다. 예를 들어 땅속에서 자라는 식물(양파, 순무 등)은 가치가 낮아서 농민들이 주로 먹었고, 나무의 과일은 하늘 높이 솟아 있어서 귀족에게 걸맞는 식품이었으며, 하늘을 나는 자고새나 꿩 같은 새는 최고의 식품이었다. 따라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감자와 같은 식물은 악하다고 의심되었다. 이런 여러 이유로 감자는 악마의 식물로 취급받았다. 천대받던 감자가 이후 유럽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무려 300년이나 걸렸다.

 

 감자대왕이라 불린 독일의 왕

 프리드리히 대왕은 독일에서 무척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다.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 등 당시 벌어졌던 유럽의 전쟁에서 독일을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군주론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등 오늘날 독일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독일 프리드리히 대왕

 그런데 이토록 위대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별명은 너무나 소박하게도 감자대왕이었다. 1750~1770년대 프로이센(독일의 옛날 지명)에서는 흉작이 잦았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에서 감자를 들여와 생산토록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농부들은 감자가 구루병이나 결핵을 일으킨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스스로 매일 감자를 먹으면서 솔선수범했다. 왕이 발벗고 나서자 감자를 꺼리던 백성들도 점차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프로이센의 만성적인 영양실조가 해결되어 굶어 죽는 사람의 수가 격감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이후 독일인은 감자를 아예 주식으로 먹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기록에 따르면, 독일인 1인이 연간 200kg의 감자를 섭취했다. 2010년 기준으로 세계 연간 감자 소비량이 평균적으로 70kg인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양이다. 현재 독일은 세계 상위권 감자 생산국이기도 하다.

 

튤립 한 송이가 집값보다 비쌌던 때가 있었다고?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튤립에 관심이 많던 식물하자 카롤루스 클루시우스는 연구 끝에 두 가지 색이 나타나는 튤립을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희소가치가 있었던 튤립은 수요에 비해 이를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서 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다 1636년 튤립 알뿌리 하나가 1만 길더, 네덜란드에서 최신 수로, 차고, 정원을 갖춘 집 한 채와 맞 먹는 가격이 되었다. 이 과열된 현상을 '틀립 버블'이라고 한다. 실제 가치보다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 형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당시 튤립 버블은 결국 꺼지고 만다. 지나치게 비싸진 튤립에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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