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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 상식

인천 차이나타운이 사교와 유흥의 장소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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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882년부터다.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군대(별기군)와의 차별대우와 민씨 일족의 전횡 등에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청나라 군대 4,000여 명이 인천을 거쳐 서울 용산에 주둔했다. 이때 군대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기 위해 40여 명의 군역 상인도 함께 들어와 부대 인근에 자리 잡은 것이 우리나라 차이나타운의 기원이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한 다음 해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狀租界章程)이 체결돼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약 1만 7,000㎟ 대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들어섰다. 이때부터 인천 선린동 일대에 중국인들이 문을 연 요릿집이 생겨났다. 요즘에도 중국요리 식당으로 유명한 공화춘, 중화루 등이다. 그런데 당시에 그곳들은 소위 부자들을 위한 '청요리집'이었다. 단순히 대중을 위한 음식을 파는 식당이라기보다는 사교와 유흥을 위한 고급 식당 역할을 했다.

 한편 이곳에서 중국식 면장(중국 장류, 춘장의 시초)에 캐러멜을 섞어 한국식 춘장이 개발되었고, 이 춘장으로 짜장면이 만들어졌다. 이후 한국 정부의 '분식 장려 운동' 등에 힘입어 짜장면은 온 국민이 즐겨 먹게 되면서 대히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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