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투리 상식

단두대/기요틴/나폴레옹의 죽음/나폴레옹의 명언/나폴레옹의 성기

728x90
반응형

단두대

세계의 처형방법 중에서 가장 잔혹하다고 알려진 것은 프랑스의 단두대다. 받침대 위로 목을 내밀고 있으면 위에서 큰 칼날이 떨어지면서 한순간에 머리가 몸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처형방법이다. 하지만 단두대는 사형수에게 가혹하다기보다는 '사형수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고안된 처형방법이다.

 단두대가 사용될 때까지 프랑스의 처형방법은 손도끼로 목을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 힘이 좋지 않은 처형자에게 걸리면 깨끗하게 목이 잘리지 않아 수형자는 단번에  죽지 못하고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된다. 사형수에게는 단숨에 싹둑 잘리는 편이 훨씬 덜 고통스럽다. 그래서 확실하게 순간적으로 머리와 몸체가 따로 분리되는 단두대가 고안되었다고 한다.

기요틴

프랑스의 단두대는 의사인 기요틴이 고안했다고 하여 기요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단두대는 기요틴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단두대는 고대 페르시아에 이미 있었다. 이 처형기구는 중세 독일에서도 사용되었다. 단두대가 프랑스의 기요틴으로 이름 붙게 된 것은 기요틴으로 사형을 집행하기 시작한 지 몇 년 뒤의 일이었다.

 '루이제트louisette' 또는 '프티트 루이종petite louison'이라 불렸던 기요틴을 설계한 사람은 독일인 슈미트Schmitt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국민의회는 프랑스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형수에게 가장 좋은 인간적인 사형방법은 단두대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의회에서 사형수의 처형방법으로 단두대를 제안한 사람이 기요틴이었다. 기요틴의 자손들은 단두대가 기요틴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너무나 질겁하여 기요틴이 죽자마자 성을 바꿔버렸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죽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1821년 5월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사망원인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한데 가장 유력한 설은 그가 위암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배 위에 손을 대고 있다. 이 모습도 위통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나폴레옹은 생전에 위통으로 괴로워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런데 스웨덴의 연구자가 이견을 달고 나폴레옹이 독살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을 분석했더니 고농도의 비소가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의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을 보면 나폴레옹은 독살된 것이 아니라 그저 비소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시대에는 비소가 약, 화장품, 염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벽지에도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소중독에 걸린 사람이 많았는데 나폴레옹이 죽은 방의 벽지를 분석해 본 결과 역시 비소가 검출되었다. 즉 비소중독으로 죽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에 의한 독살이 아니라 벽지의 비소를 흡수해서 죽었다는 설을 내놓았다. 나폴레옹의 죽음을 둘러싼 이 논쟁은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설만 분분하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엇다" 라고 말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한 번도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을 뿐이다. 1806년에 이에나의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은 프로이센과 싸우기 위해서 고지로 대포를 끌어올려야 했다. 높은 산에 대포를 운반하는 작전을 세우자 병사들은 "불가능" 하다고 말했고, 이것을 보고하러 온 사령관에게 나폴레옹이 "불가능이란 말은 프랑스어에 없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전의 오스트리아와의 싸움에서도 "곤란이라는 말은 프랑스어에는 없다" 라고 말해서 병사들을 격려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 프랑스어에는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라는 명문장으로 바꾼 것은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러나 어찌됐든 프랑스에 없다는 말이나 나의 사전에 없다는 말이나 맥락은 같다는 점에서 도찐개찐이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말한 셈쳐도 무방하다.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뜻은 같은 말 아닌가?

 

나폴레옹의 페니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자 부검을 담당한 의사는 나폴레옹 황제의 페니스를 잘라서 섬의 사제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 후 나폴레옹의 시신은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와서 파리의 상 루이 교회의 관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절단된 페니스는 팔리고 팔려 1977년에는 미국의 한 비뇨기과 의사가 3800불을 주고 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의 행방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미국의 의사가 샀을 때 나폴레옹의 페니스는 3센티 정도의 크기로 말라 있었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의 괴수도승 라스 푸틴의 성기는 아직도 거대한 크기로 보존되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