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인종
중세 유럽의 그림에는 그리스도의 초상이 매우 많다. 대개 얼굴은 약간 갸름하고 머리카락은 길며 세련된 백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이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고대 헤브라이인, 즉 유대인의 선조였기 때문이다. 아시아계 피가 섞인 고대 헤브라이인의 피부는 갈색에 가깝고 머리카락도 검고 곱슬머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그린 초상화에서처럼 찰랑거리는 긴 머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검은색 곱슬머리에 갈색 피부를 가진, 아시아계의 얼굴 모습으로 사납고 날쌘 모습을 한 이스라엘 병사와 같은 얼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로마제국 멸망
무려 천 년 동안 지속되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것은 작은 문 때문이었다. 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린 동로마제국은 매우 쇠퇴하여 15세기에는 수도 비잔틴(현재 터키의 이스탄불)과 도시 몇 개만이 겨우 남아 있었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터키)가 침공했을 때 비잔틴은 성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50일 동안 농성전을 벌였다. 비잔틴 제국의 군사는 약 8천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15만의 오스만 투르크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성벽이 견고하여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한 것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비잔틴 성에는 여러 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케르카포르타라는 작은 성문이 채 잠기지 않았던 것이다. 양쪽 모두 성문이 열려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오스만 투르크군의 병사가 케르카포르타가 잠겨 있지 않은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말았다. 오스만 투르크군은 이 작은 성문을 통해 비잔틴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15세기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인 비잔틴, 즉 이스탄불은 현재 터키의 영토다.
중세 기사 갑옷
중세 유럽에는 알루미늄이나 두랄루민처럼 가벼운 비금속은 없엇다. 그래서 중세 기사의 갑옷은 모두 강철로 만들어졌다. 그 무게만 해도 사람의 몸무게와 맞먹는 70~ 80㎏이나 되었다. 그래서 중세의 기사들은 한번 쓰러지면 자신의 갑옷 무게 때문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말을 탄 채로 쓰러진 적의 목이나 팔, 다리 등 갑옷이 이어지는 틈새를 단검으로 찔러 목숨을 빼앗았다. 이것이 중세의 싸움 방법이었다.
그러면 왜 기사들은 이렇게 불편한 갑옷을 입었을까? 그것은 석궁으로 쏘는 화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가벼운 갑옷으로는 석궁을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농민 반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것은 당나라 때이다. 당나라 황실은 재정적자가 심했다. 이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백성들끼리 사고팔던 소금의 자유판매를 금지하고 국가가 독점하는 소금 전매제도를 실시했다. 소금 값에는 종래의 4배에 달하는 세금을 매겼다.
사람은 소금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하지만 백성들은 매우 가난하여 무거운 세금이 매겨진 소금을 살 수가 없었다. 소금의 밀매가 성행하고 작은 반란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대개 농민반란으로 멸망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 그대로이다. 당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황소의 난은 소금에 대한 전매제도에 반발한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당나라는 농민의 지지를 이미 잃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는 당의 각 도시를 공격하고 재산과 먹을 것을 빼앗아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세력을 늘려 60만 대군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당의 수도인 장안을 습격했고, 소금을 독점하려던 당제국은 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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