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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문 역사

서양생활사 - 사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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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시대  사우나

 목욕을 사교적인 행위로 만든 사람들은 기원전 2세기 경의 로마인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가장 사치스럽고 비싼 헬스 클럽과 맞먹을 거대한 공중 목욕탕 단지를 건설했다. 사치와 레저를 즐기던 로마인들은 이 사교 목욕탕에 정원, 상점, 도서관, 운동실, 그리고 시를 읽기 위한 라운지까지 갖추었다.

 예를 들면 카라칼라의 목욕탕은 로마인들에게 다양한 건강과 미의 옵션을 제공했다. 어느 거대한 단지에는 바디 오일을 바르고 때를 미는 살롱, 열탕, 온탕, 냉탕, 사우나실, 머리 감고 향을 바르고 곱슬거리게 하는 곳, 매니큐어 가게, 운동실이 있었다. 여러 가지의 화장품과 향수도 살 수 있었다. 운동을 하고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고 나면 로마 귀족은 옆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강의실에 들러 철학과 예술을 논할 수 있었다. 화랑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었고, 같은 단지 내에 있는 또 다른 방에서는 노예들이 수없이 음식을 갖다 나르고 포도주를 따랐다.

 이것은 오늘날의 골든 도어Golden Door와 같은 유명인사용 사우나였다. 차이가 있다면 로마 클럽이 더 크고 훨씬 더 많은 멤버들(한번에 2,500명 정도)이 이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자용 사우나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비슷하지만 약간 작은 여자용 사우나도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목욕을 했지만 나중에는 같이 목욕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국가적 정책을 시행하던 초기 기독교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혼욕이 1천년 후 유럽에서 다시 시작되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광범위한 성문란을 초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태리어로 '바지노bagino'라는 말은 목욕탕bath과 사창굴brothel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했다. 500년경에 이르러 로마의 사치스러운 사우나는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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