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물뿌리개는 실내에서 작은 식물에 물을 줄 때만 쓰인다. 이때 물뿌리개에 물을 계속 채우는 일은 지겨운 일이다. 그렇지만 고무 호스가 개발되기 전에는 크기에 관계없이 잔디, 화단, 채소밭에 물을 줄 때 언제나 물뿌리개를 사용했다. 고무호스와 소방호스는 시간을 절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조된 최초의 고무제품이었다. 자동차 타이어나 비옷이 나오기 전이었다. 그리고 고무호스 때문에 고무산업이 생겨났다.
고무는 16세기 유럽에는 새롭고 신기한 물질이었다. 미국 인디언들이 만든 최초 고무공은 콜럼버스에 의해 스페인에 소개된 후 2세기 동안 많은 유럽 발명가들이 이 물질을 가지고 실험해 보았지만 실용적인 목적에 적용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자연 상태에서의 고무는 추울 때는 부서지고 더울 때는 달라붙는 성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엌에서 우연한 사고를 통해 고무를 포송포송하고 부드럽고 유연한 물질로 만드는 비법을 발견한 사람은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였다.
굿이어는 가죽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가죽의 질을 연하게 하고 또 단단하게 하는 것처럼 고무도 그렇게 하면 더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838년 어느 2월 저녁 그는 자기 집 부엌에서 고무를 가공처리하기 위해 여러가지 화학물질을 섞으며 실험하고 있었다. 고무와 유황의 혼합물이 스푼에서 난로의 뜨거운 표면에 떨어졌다. 이것을 닦을 정신이 없었던 그는 계속해서 실험했고 고무는 녹은 후 다시 냉각되어 고체가 되었다. 녹아 붙은 덩어리를 떼려고 했을 때 굿이어는 고무가 부드럽고 포송포송하고 유연하게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날 밤 겨울의 혹한 속에서 그는 부엌문 바깥에다 이것을 붙여 놓았다. 아침에 이것을 들여와서 다시 구부려 보았을 때 그는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것은 부서지지도 않았고 원래의 유연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굿이어는 유황이 고무를 경화시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경화 과정을 완성키시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실험이 필요했다. 그러나 굿이어는 돈이 없었다. 그는 더 나은 고무를 찾기 위해 이미 엄청난 시간과 돈을 다 써버렸다. 그와 아내, 다섯 명의 자녀는 빈털터리였고 친척집에서 빌붙어 살고 있었다. 그는 가족의 재산을 잡혔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교과서까지도 팔았다. 그가 나중에 1855년에 껌 고무와 변종( Gum Elastic and Its Varieties)이라 책에 썼듯이 자신과 가족까지 모든 재산을 쏟았던 이유는 성공이 너무나 확실해 어떤 희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찰스 굿이어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는 빚 때문에 감옥에 갔고 1860년에 죽었을 때는 가족에게 20만 불의 부채를 남겼다.
고무가 미국의 꿈의 제품이 된 것은 굿이어가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였다. 이것은 이름이 굿이어와 놀랍게도 비슷한 사람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남북전쟁 때 의사였다가 사업가로 변신한 벤자민 프랭클린 굿리치 박사는 1870년에 오하이오 주의 아크론에서 비 에프 굿리치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는 고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알려진 게 없었다. 그러나 굿리치는 고무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친한 친구 집이 불이 났을 때 가죽 소방호스가 제기능을 못하는 바람에 몽땅 불에 타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펜실베니아의 유전지대에서 그는 석유를 수송할 고무 호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의학 공부를 통해 고무가 외과수술이나 갱생 요법( 못 쓰게 된 물건이나 소용없게 된 물건을 손질하여 다시 쓸 수 있도록 함 )에 여러가지로 사용될 수 있음을 또한 알고 있었다.
재능이 있고 상냥했던 그는 사업가들을 설득해서 자신이 새로 설립한 고무회사에 투자하도록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몇 달 내에 아크론 공장은 세계 최초의 고무호스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튼튼하고 면을 입힌 소방호스가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이 되었다.
1871년은 또한 가스킷gasket, 병마개, 보관용 병의 둥근 마개, 가정주부들이 이용하는 빨래 짜는 기계의 롤러 등 여러가지 고무 제품들이 최초로 나온 해이기도 하다. 집 바깥에서 쓰는 물건으로서는 정원용 호스가 주된 품목이었다. 가죽호스는 여러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 물에 적셨다가 말리면 가죽은 노쇠하고 갈려졌다. 햇빛에 오래 두어도 부서졌다. 탄력성 또한 매우 한계가 있었고 터질 위험도 많았다. 반면에 굿리치의 고무는 습기와 온도에 무관했으며 강한 내부 수압을 견딜 뿐만 아니라 터질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1880년대를 통하여 직업적인 정원사이건 주말에만 정원을 돌보는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다 기꺼이 물뿌리개를 버리고 고무 호스를 들었다. 고무 호스는 잔디밭뿐만 아니라 정원사에게 내려진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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