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제조
기원전 400년경에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판유리를 유리창으로 사용했지만 온화한 지중해 기후 때문에 이것은 단지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유리는 주로 보석 가공 등 실용적인 목적에서나 사용되었다.
유리의 취입성형이 기원전 50년경에 발명되면서 고품질의 유리창이 가능해졌다. 로마인들은 가정과 연회실에서 쓸 갖가지 모양과 크기의 술잔을 만드는데 이 기술을 사용했다. 고대 로마도시 유적에서는 많은 유리그릇들이 발굴되었다.
로마인들은 판유리 기술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판유리 기술혁신은 훨씬 더 추운 독일 지방에서 중세초기에 일어났다. 서기 600년에 유럽 유리제조 중심지는 라인강가에 형성되었다. 유리 작업에는 엄청난 기술과 오랜 견습기간이 필요했고 이런 전제 조건들은 유리제조 기술자를 일컫는 개퍼gaffer라는 이름에도 반영되었다. 이 말은 학식이 많은 할아버지라는 뜻이다 그의 정교한 예술품은 너무나 귀중했기 때문에 그가 긴 대롱을 사용해서 유리를 부는 화로 구멍은 성스러운 구멍이라고 불렸다.
유리제조자들은 창문을 만들기 위해 2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좋지는 않지만 널리 사용되는 방법인 실린더 제조법에서는 유리제조자들이 용해된 실리카를 둥근 구 모양이 되게 한 후, 앞뒤로 흔들면서 실린더 모양으로 길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실린더를 길게 잘라서 판유리 모양으로 폈다.
노르망디 유리제조자들의 특기인 왕관 제조법에서는 기술자들이 유리를 불어 구를 만들면서 끝에 쇠막대기를 붙인다. 그런 다음 막대기를 빼면 한쪽 끝에 구멍이 남게 된다. 그리고 나서 구를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 원심력 때문에 구멍이 팽창하게 되고 마침내 구가 디스크 모양으로 펴지게 된다. 왕관 유리는 실린더 유리보다 더 얇았고 작은 유리창에만 사용되었다.
중세 때 유리를 구워서 착색한 스테인드 글래스 유리창이 있는 높은 유럽의 성당들은 대륙에서 제조되는 판유리의 대부분을 독점했다. 유리창은 교회에서 부유한 가정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일반 가정으로 퍼져나갔다. 그 당시 실린더 제조법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큰 판유리는 넓이가 120cm 정도여서 유리창의 크기에도 제한이 있었다. 17세기에 유리제조술이 발달하면서 약 400cm x 210cm의 유리도 생산했다.
1687년 프랑스 오를레앙에 사는 유리제조가 베르나르 페로는 판유리를 펴는 기술 특허를 냈다. 뜨거운 용해된 유리를 커다란 철제 테이블 위에 부은 후 무거운 철제 롤러로 펴는 기술이었다. 이 방법으로 전신 거울을 만드는 데 적합한 비교적 왜곡이 없는 대형 판유리를 처음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파이버글래스
파이버글래스는 잘게 뽑아낸 유리 필라멘트를 실로 만들어서 이것을 다시 단단한 판유리나 유연한 섬유로 짠 것을 말한다.
파리의 기술자 뒤비스 보넬은 1839년 유리를 뽑아내고 짜는데 대한 특허를 얻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너무 복잡하고 불편했다. 얇은 유리실이 가단성可斷性을 잃지 않도록 덥고 습한 방에서 작업을 해야 했으며, 이것을 짜는 것도 자카드jacquard 타입의 문직기(무늬를 짜는 기계)에서 조심스럽게 작업해야만 했다. 당시 사람들은 유리를 천처럼 짤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특허 신청을 하면서 뒤뷔스 보넬은 작은 직사각형의 파이버글래스 샘플을 첨부했다.
안전 유리
아이러니컬하게도 안전유리 발견은 1903년 프랑스 화학자 에두아드 베네딕투스가 유리를 깨뜨리는 사고를 내면서 얻은 결과였다. 어느 날 실험실에서 베네딕투스는 사다리를 타고 선반에 있는 시약을 가지러갔다가 잘못해서 플라스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으나 내려다보니 놀랍게도 깨진 플라스크 유리가 원래 모습으로 서로 붙어 있었다.
조수에게 물어본 결과 베네딕투스는 최근에 이 플라스크에 질산셀룰로오스 라는 액체 플라스틱 용액이 담겨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용액은 증발해 버리고 얇은 플라스틱 막이 플라스크의 내부에 코팅되었는데, 겉으로 보기에 깨끗했으므로 조수는 급한 김에 씻지도 않고 선반에 그냥 갖다놓았던 것이다.
사고로 베네딕투스가 안전유리 원리를 발견한 것처럼 또 다른 사고들을 통해 그는 이것을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을 알게되었다. 1903년에 자동차 운전은 파리 사람들에게는 새롭지만 위험한 취미였다. 베네딕투스가 실험실에서 발견했던 바로 그 주에 어느 파리 신문은 최근에 자동차 사고들이 잇달아서 발생한다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깨어진 앞유리창 때문에 중상을 당한다는 내용에, 베네딕투수는 자기가 발견한 독특한 유리가 생명을 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 갑자기 내 눈앞에 깨어진 플라스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벌떡 일어나 실험실로 달려가서 내 생각의 실현 가능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꼬박 24시간 동안 나는 액체 플라스틱으로 유리를 코팅했다가 깨뜨리는 실험을 반복했다."
그는 또 이렇게 적었다.
"다음날 저녁 나는 장래성이 좋은 최초의 트리플렉스(Triplex:안전유리)를 만들어냈다."
불행하게도 새로 나온 사치 상품의 가격을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비싼 안전유리를 앞유리창에 사용하는데 대해 관심이 없었다. 운전의 안전성은 제조업자가 아니라 운전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태도였다. 사고를 막기 위해 안전장치들이 자동차 디자인에 적용되기는 했지만 일단 사고가 났을 때 부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들은 없었다.
안전유리가 처음으로 널리 실용적으로 사용되게 된 것은 1차 대전이 터지고 나서였다. 이것은 방독면의 렌즈로 사용되었다. 제조업자들은 작은 타원형의 안전유리를 만드는 것이 비교적 쉽고 값도 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렌즈 때문에 군인들은 이때까지 절실히 필요했지만 얻는 것이 불가능했던 보호장치를 갖게 되었다. 전투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유리의 성능을 시험해 본 후에야 자동차업자들은 안전유리를 자동차의 앞유리창으로 사용했다.
윈도우
윈도우window 라는 말의 어원에는 시적인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은 바람의 눈 wind's eye을 의미하는 스칸디나비아어 vindr와 auga를 합친 말에서 유래했다. 옛날 노르웨이의 목수들은 집을 가능한 한 단순하게 지었다. 겨울 내내 문을 닫아두어야 하기 때문에 연기와 탁한 공기는 지붕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환기되었다. 바람이 이 구멍을 통해 휘파람 소리를 내었기 때문에 이 구멍은 '바람의 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국 건축업자들은 노르웨이의 용어를 빌어서 이것을 '윈도우'라고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공기를 들여보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이 구멍에는 유리를 덮어서 오히려 바람을 막아내게 하였다. 지붕의 구멍을 벽면의 구멍으로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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