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틀
구멍 뚫린 바늘은 역사상 놀라울 정도로 오래 전에 등장했다. 4만년 전에 거주한 구석기 동굴에서 상아, 뼈, 해마이빨 등으로 만든 바늘이 발견됐다. 어떤 의미에서 바늘구멍 발명은 그 중용성에 있어서 불 발견이나 바퀴 발명과 맞먹는다. 불이 음식 습관을, 바퀴가 여행 방법을 바꾸었다면, 바늘은 옷 입는 방법을 바꾸었다.
오랜 구석기시대부터 1830년까지 사람들은 손으로 바느질을 했다. 숙련된 재봉사는 1분에 약 30바늘을 꿰맬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최초 재봉틀은 조잡하고 비효율적이긴 했지만 1분에 200바늘을 꿰맬 수 있었다. 간단한 한 줄 짜리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이 초기 재봉틀은 프랑스 리옹 출신의 재봉사 바르델레미 띠모니에가 만들었다.
재봉틀을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든 정부는 곧 띠모니에에게 80대의 재봉틀을 가동하게 하여 군복을 생산하게 했다. 마침내 재봉틀이 자신의 생계에 위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 직업 재봉사들이 노한 폭도가 되어 띠모니에의 공장을 습격하여 기계를 모두 부숴버렸다. 띠모니에도 거의 죽을 뻔했다. 띠모니에는 암플레퓨스라는 마을로 도망가서 가난에 못 이겨 죽었지만, 그의 재봉틀은 여러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엘리아스 하우 & 아이작 싱어
엘리아스 하우는 아내와 세 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근근히 살아가는 보스턴의 기계공이었다. 1839년 어느 날 그는 바느질하는 기계를 누가 만들 수 있다면 틀림없이 큰 돈을 벌 것이라는 이야기를 사장이 고객에게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우는 이때부터 밤낮 그 생각만 하게 되었다.
처음에 하우는 바느질하는 아내의 손을 자세히 관찰하다가 그녀의 뜸뜨는 동작을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이것이 실패하자 그는 강하면서도 기계로 디자인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스티지stich를 고안하려 했다.
스티치는 자수, 편물, 양재에서 한 땀이나 한 코, 또 바늘로 뜨고 짜고 꿰매는 모든 바느질 방법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는 1846년 9월에 재봉틀의 특허를 내고 이것을 유망한 제조업자들에게 시범 보이기 시작했다. 이 재봉틀은 똑바로 얼마 동안 가다가 실을 다시 조정해야 했지만 1분에 250바늘을 꿰맬 수 있었다. 미국 의류 제조업자들은 이 재봉틀을 보고 마음에 들어하긴 했지만 300불이라는 가격에 망설였고, 또 재봉사와 재단사들의 위협도 무서워했다.
빈털터리가 되어 미국에서 사업에 환멸을 느낀 하우와 그의 가족은 1847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2년 후 더 작은 자본금과 더 불투명한 전망을 가지고 하우는 배의 요리사를 해서 뱃삯을 대면서 가족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뉴욕에 도착해서 그는 가게에서 자기 것과 비슷한 재봉틀을 100불에 선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여러 제조업자들의 특허권, 특히 보스턴의 기계공 아이작 싱어의 특허권을 조사했다.
싱어의 기계는 하우의 것보다 우수했다. 싱어의 재봉틀에는 아래위로 움직이는 곧은 바늘이었다. 그에 비해 하우의 바늘은 곡선이었고 수평으로 움직였다. 또 옷감을 고정시키는 조절 레버가 있어서 길고 곧은 뜸이나 곡선의 뜸을 뜰 수 있었다. 또 발로 작동하는 발판이 있었다. 하우의 것은 손으로 돌리는 바퀴가 있었다. 그러나 싱어의 기계는 하우가 특허 낸 특정 깁는 법을 만들어냈다.
성격이 활달하고 야심이 강한 사업가인 싱어는 최초 재봉틀 발명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데 관심이 없었으므로 하우와 법정 밖에서 합의 보기를 거절했다. 그는 아내와 두 자녀, 그리고 정부와 또 여섯 명의 자녀를 부양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변호사에게 말했다. "나는 발명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요. 내가 노리는 건 바로 돈이란 말이오."
법정에서 사건이 질질 끄는 동안 하우보다 8년 먼저 재봉틀을 고안한 또 다른 미국 발명가가 등장했다. 월터 헌트는 여러가지 많은 발명품을 만든 천재였는데, 그가 만든 것 중에는 3시간 만에 만든 안전핀도 있었다. 그는 15달러 빚을 갚기 위해 특허권을 4백 달러에 팔았다. 헌트는 재봉틀 때문에 재단사들이 일자리를 잃을까봐 자신의 재봉틀의 특허도 청구하지 않았고 홍보도 하지 않았다. 1853년에 하우와 싱어의 법정 싸움이 일어날쯤에는 헌트의 재봉틀은 하나의 녹슨 쓰레기 더미가 되어 있었다.
재판을 주재하던 판사는 싱어가 번 돈을 월터 헌트가 아니라 일리아스 하우와 나눠야한다고 판결했다. 재봉틀이 제조될 때마다 하우는 로열티를 받았다. 1867년에 48세 나이로 죽기 전 한때 가난에 찌든 기계공은 한 주에 4천 달러 이상의 로열티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를 언제나 지지해 주고 재봉틀의 상업적 가능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 그의 아내는 재봉틀로 돈을 벌어들이기 전에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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