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투리 상식

이-팔 분쟁/티벳과 중국의 관계/달러/로마의 소금/동전 제조년도/마요네즈 공장/콘돔의 유효기간/스타벅스의 유래

728x90
반응형

이-팔 분쟁

 팔레스티나로 유태인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유태인들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팔레스티나의 주민들과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투르크(터키) 때문에 고생한 영국은 아랍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독립을 약속했다(맥마흔 서한). 다른 한편으로 영국은 유태인들에게 팔레스티나에서 유태인의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을 지지했다. 이것이 벨푸어 선언이다. 이렇게 영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양쪽에 각기 같은 땅에서 독립을 약속해 양다리를 걸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유엔은 팔레스티나를 유태인의 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국제관리 하에 둘 것을 결의했다. 이 유엔 결의를 통해 이스라엘이 1948년도에 독립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반대하는 아랍국가들 즉 이집트, 시리아 등이 이스라엘로 진공하면서 아랍전쟁이 터졌다. 하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요르단강 서안을 뺴앗기고 말았다.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94만 명이나 난민이 되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1967년 유명한 6일 전쟁으로 다시 난민이 생겨났고 새로운 점령지인 가자,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 지역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은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에 빼앗긴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1993년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 민족해방기구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생활의 터전을 잃은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이스라엘 영토에서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지역으로 출퇴근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인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게 되고 서로 무쳑충돌을 계속하고 있다.

 수천년 동안 전세계를 떠돌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20세기에 들어서 겨우 터 잡은 땅을 내주지 않기 위해 강력한 무력을 사용하고 있고, 국제적인 독립 약속을 배신당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에 큰 반감을 갖고 있다.

 

티벳과 중국의 관계

 

 불교국가인 티벳은  티벳 불교의 수장인 법왕 달라이라마가 다스렸다.

 1910년 청나라 정부는 동티벳을 점령하고 서장성을 설치했다. 당시 티벳을 다스리던 달라이 라마13세는 청나라 군대가 라싸로 입성하기 직전에 인도로 탈출했다. 1912년 티벳인들은 티벳에 주둔하던 청 제국 군대에 대항해 티벳 독립을 주장했다. 1912년 6월, 인도에 망명 중이던 달라이 라마 13세는 티벳으로 돌아와 모든 중국인 병사들은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곧 중국 군대를 몰아내고 티벳군이 다시 티벳으 대부분을 장악했다.

 달라이라마 13세는 군중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수도 라싸에 진입했고, 1913년 티벳 독립을 선언했다. 1933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사망하고 1940년 달라이 라마 13세의 환생자로 인정받은 톤도프가 달라이 라마 14세로 즉위했다. 티벳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는 선대의 달라이라마가 환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1950년 중국이 다시 침공했고, 이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959년 티벳 수도인 라싸에서 대규모 시민봉기가 일어나 중국 인민해방군과 대치하자 제14대 달라이라마는 티벳인들의 안전을 위해 인도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으며 비폭력으로 일관해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중국은 티벳의 독립국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은 티벳의 정치집단은 서장 지방정권이었으며, 티벳은 중국의 영토로 서장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티벳 영토의 정반 이상을 티벳 근처의 중국영토인 청해성, 사천성, 감숙성 등지로 편입시켰다. 현재 중국의 서장자치구는 티벳 영토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한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현재 독립을 포기하고 티벳의 자치권을 인정해달라고 중국에 요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티벳은 원래 독립국가였으며 청나라가 침공하고 청이 망하자 중국이 다시 침공하여 강제로 국권을 뺴앗긴 상태다. 달라이라마는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독립이 여의치 않아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티벳은 엄연히 독립국가로서의 역사가 있고 독립 투쟁을 해왔으므로 국제사회가 정의구현을 하고 티벳인들이 독립의지가 있다면 독립을 시키는게 역사적 정의에 맞다.

 

 달러

 국제화폐로 통용되는 미국 화폐단위는 달러다. 캐나다와 뉴질랜드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이 화폐단위로 달러를 쓴다. 그런데 달러는 원래 독일의 화폐단위였다.

 독일의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요하임 골짜기(세인트 요하임 스탈)의 은광에서 채굴된 은으로 만든 은화의 이름은 '요하임스탈러Joachimsthaler' 라고 불렸다. 줄여서 '탈러' 로 불린 이 은화는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쓰였다. 탈러가 다른 나라에서도 쓰이면서 그 이름도 변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다렐', 스페인에서는 '다레라' 라고 불렸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 화폐단위는 파운드와 펜스다. 그런데 왜 미국은 달러를 쓰게 되었을까? 미국에서는 은이 나지 않는다. 신대륙의 스페인 식민지에는 은광이 많았고, 스페인은 이 식민지 은으로 다레라 은화를 만들었다. 미국은 스페인령과 밀무역을 통해 담배와 면화 등을 수출하고 스페인의 다레라 은화를 받았다. 다레라의 영어식 읽기가 바로 달러dollar다. 

 한편 탈러를 쓰던 독일의 화폐단위는 마르크다. 독일은 유럽 통합 이후에 유로를 쓴다.

 

 로마의 소금

 샐러리맨은 'salary(월급)'와 'man' 을 조합하여 만든 한국식 영어다. 월급이라는 의미의 salary의 어원은 라틴어의 ''sal(소금)'이다. 

 고대 로마시대 병사의 월급은 소금으로 지급되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과 같이 기원전 3~4천 년에 거려 발전한 고대문명의 중심지 옆에는 반드시 소금 산지가 있었다. 소금 제조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소금은 귀금속에 필적하는 귀중한 생필품이었다. 소금이 없으면 저장식품을 만들 수가 없고, 원정이나 전쟁에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는 유럽 각지로부터 소금을 수입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했다. 이탈리아 최고의 도로 이름은 'Via Salaria' 인데 '소금길' 이라는 뜻이다.

 

동전 제조년도

 다 같은 돈인데 지폐에는 제조년도가 안보이지만 동전에는 제조년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동전을 주조하는 소재가 제조년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동전은 여러가지로 금속의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 은, 동, 주석, 알루미늄 등이 그것인데, 이들 금속의 가치는 시세에 따라 크게 변동한다. 이 때문에 제조비용 예산에 따라 매년 금속의 합금 비율이 조절된다. 그러므로 동전에는 금속의 합금 비율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제조년도를 새겨 넣는다. 사실은 지폐의 경우도 전문가 보면 바로 제조년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마요네즈 공장

 마요네즈는 달걀 가운데 노른자만을 원료로 사용한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남은 흰자는 버리지는 않는다. 달걀흰자는 감기약 등에 이용되는 소염 효소인 염화 리조팀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에 제약회사로 팔린다. 최근에는 달걀노른자 뿐만 아니라 흰자까지 모두 사용하여 만드는 마요네즈도 있다고 한다.

 

 콘돔 유효기간

 콘돔에 표시되어 있는 유효기한은 너무 작게 표시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기한이 지났다고 해서 바로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사고가 생겨도 제품 회사에서 보증해 줄 방법은 없다. 기한이 지난 콘돔은 고무가 약화되어 찢어지기 쉬우므로 사용하지 않는게 바람직하다.

 

 스타벅스 유래

 국내에도 커피 체인점인 스타벅스가 많이 있다. 스타벅스의 역사는 1971년 미국 시애틀에서 오픈한 '스타벅스 커피 티인대 스파이스'에서 시작되었다. 창업자는 영어교사였던 제럴드 볼드윈과 역사교사였던 지브 시글, 작가인 고든 보우커 세 사람이다. 

 고든은 원래 회사명을 명작 '모비딕'에 나오는 포경선, 피쿼드pequod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친구인 테리 헤클러가 '오즘pee으로 형무소quod 커피를' 마시느냐며 강하게 반대했다. 테리는 시애틀 부근에 있는 레니어 산기슭에 있던 '스타보'라는 채굴장의 이름을 제안했다. 그래서 열띤 의논을 거친 뒤 최종적으로 창업자 제럴드 볼드윈이 '모비딕'의 피쿼드호 선원 가운데 커피를 좋아하는 일등 항해서 '스타벅'을 발견하여 그 이름을 따서 스타벅스라고 짓게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