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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 상식

재즈의 어원/비틀즈의 매니저/고흐의 귀/피카소의 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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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어원

재즈는 흑인음악에서 비롯되었다. 재즈의 고향은 미국의 뉴올리언스다. 하지만 재즈라는 말이 생긴 것은 시카고에서였다. 어느 날 밤, 시카고의 한 클럽에서 트럼펫 연주자 톰 브라운의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는데, 흥에 겨운 손님 중 하나가 '재즈 잇 업 Jass it up' 이라고 외쳤다. 재즈 업Jass up' 이란 당시의 속어로 '흥청거린다, 흥분하다, 섹스하다' 는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었지만, 이 말이 그 장소의 분위기와 딱 어울렸다. 그 자리에서 밴드의 멤버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재즈Jazz' 라 부르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재즈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틀즈 매니저

비틀즈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매니저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이다. 그는 리버풀의 레코드가게 주인이었다. 그와 비틀즈를 이어준 사람은 한 소녀였다고 한다. 앱스타인의 가게는 '모든 레코드가 다 있다' 는 표어를 내걸고 있었다. 그 소녀는 비틀즈가 서독 함부르크에서 레코딩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앱스타인의 가게에 들렀지만 비틀즈의 레코드는 없었다. 앱스타인은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비틀즈가 어떤 그룹인지 궁금했기에 좁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연주하고 있던 비틀즈를 보러 갔다. 처음으로 비틀즈를 본 앱스타인은 신의 계시와 같은 충격을 받고 그 장소에서 그들의 매니저를 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곤 곧 비틀즈를 유명하게 만든 일등공신이 되었다.

 

고흐의 귀

프랑스의 아르르 전원지대에서 화가인 고갱과 고흐가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흐와 고갱은 예술관에 대한 논쟁을 자주 벌였다고 한다. 어느 날 고흐는 고갱에게 면도칼을 들이대며 달려들었고 고갱은 도망을 쳤다. 다음 날 고갱이 돌아와 보니 고흐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고희가 자신의 귀를 잘랐던 것이다. 고갱과 늘 다투다가 정신병이 발작해서 돌발적으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 고흐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잘린 귀는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고흐는 스스로 자른 귀를 근처의 창녀촌으로 가서 라셀이라는 여자에게 소중하게 간직해 달라고 전했다고 한다. 그 후 이 라셀이라는 창녀가 고희의 귀를 어떻게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으므로 필시 라셀은 고흐에게 받은 잘린 귀를 버렸을 것이다. 만약 고흐가 사후에 그토록 유명해질 것을 알았다면 라셀은 당연히 고흐의 잘린 귀를 잘 보관해 두었을 것이다. 사후이기 때문에 라셀에게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사후 유명세를 알았더라도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피카소의 미신

하나의 화면에 다른 방향에서 본 인물을 그려 넣는 입체기법으로 입체파라 불리는 피카소는 수많은 명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인기가 높은 작가다. 그의 화풍은 크고 시원시원하며 분방하다. 사람들은 호방한 화풍 때문에 그를 호쾌한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신경질적이고 겁이 많은 성격으로 미신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는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모자를 던져 늘 놓아두는 곳에서 벗어나면 대소동을 일으켰다. 그는 모자를 놓아두는 곳에 모자가 없으면 가족 중 누군가가 그 해 안에 죽어 버린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빵을 납작한 쪽이 아니라 위로 부풀어 오른 둥근 쪽을 아래로 뒤집어 불안정하게 두었다. 바르게 놓으면 불행이 찾아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재수가 없다고 생각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스페인에서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런 미신을 잘 지켜온 피카소는 결혼, 이혼, 재혼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 아내가 바뀔 때마다 아내 나라의 미신이 더해지면서 그의 미신은 더욱더 넓어졌다.

피크닉을 갈 때는 가족 모두 정해진 방에 모여 일 분 동안 입을 열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야외에서 사고가 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 분간 침묵을 지키는 일은 간단한 것 같아도 어린 아이들에게는 좀처럼 참기 힘든 긴 시간이다. 누군가가 소리를 내거나 웃으면 피카소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럭저럭 일 분간 가족 모두가 말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피카소도 간신히 안심하고 미소를 지었고 비로소 집의 문을 나설 수 있었다.

 

1911년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가 도난을 당했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는데 많은 사람들이 용의자, 참고인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때 피카소도 용의자로 조사를 받았다. 피카소가 용의자가 된 것은 과거의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친구였던 시인 아폴리네르의 비서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은 조각이나 가면을 훔쳐서 피카소에게 나누어준 적이 었었다. 그런데 그 비서가 잡지에 자신의 비리와 함께 피카소에게도 장물을 나누어주었던 사실을 공개하고 말았다. 놀란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그에게서 받았던 조각품을 세느 강에 모두 버리려다 버리지 못하고 루브르 박물관에 전해주러 간 적이 었었다. 

모나리자 도난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피카소는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다. 모나리자가 루브르로 돌아온 것은 2년 반이 지나서였다. 이탈리아의 골동품 가게에 모나리자를 팔고 싶다는 남자가 나타났고, 경찰이 그 남자를 체포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범인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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