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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문 역사

서양생활사 - 화장품 역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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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즈, 분, 립스틱

 그리스 남자들은 자연스러운 용모를 높이 평가하고 대부분의 화장품 사용을 꺼려하긴 했지만 뺨에 바르는 루즈만은 사용했다. 그리고 그리스 정부들은 먼저 흰색 분으로 피부를 코팅함으로써 루즈의 빨간색을 강조했다. 그후 2천년 동안 유럽 여인들의 얼굴, 목, 그리고 가슴을 희게 했던 이 화장분에 많은 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피부를 망치게 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때 아닌 죽음을 맞게 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얼굴을 하얗게 만들기 위해 실제로 '비소안색 웨이퍼'를 먹었다. 이것은 효과가 있었다. 피에 독성이 들어가 더 적은 헤모글로빈 세포가 혈관을 흘렀고 신체의 각 기관에도 산소가 부족하게 공급됨으로써 발생되는 결과였다.

 그리스와 로마의 남녀들은 원치 않는 신체의 털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했던 석웅황도 주요 성분이 비소 합성물이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위험했다.

dying makeup

 

 루즈라고 더 안전하지는 않았다. 뽕나무와 해초와 같이 아무런 해가 없는 채소 성분으로 루즈의 기초물질을 만들긴 했지만 진사라는 독성이 강한 수은의 빨간 황화물을 가지고 채색을 했다. 몇 세기 동안 똑같은 빨간 크림이 입술을 바르는 데 사용되었는데, 입술을 통해 독이 더 쉽게 섭취돼 자기도 모르게 중독되었다. 일단 혈액에 들어가면 납, 비소, 그리고 수은은 태아에 심각한 해를 입혔다. 그 결과 유산, 사산이 비일비재했고, 또 선천성 기형아들이 태어났지만 그 수는 추정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기형아는 태어나자마자 버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화장품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자들이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을 금하려는 시도는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유뿐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도 무수히 있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신부가 화장술로 자신을 속이는 데 대해 '잘 꾸려나가는 살림살이Good Husbandry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가 화장을 한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녀가 화장으로 자신의 모습을 속이는 것은 내가 내 재산에 대해서 그녀를 속이는 것만큼이나 부정적인 일이라고 그녀에게 지적했다.'

 

 그리스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화장술을 통해 남편을 속여 자기와 결혼하게 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2세기에 주장했다. 그리고 1770년에도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하는 가혹한 법령이 영국 의회에서 도입되었다. 다만 나중에 부결되었다.

 

 "나이, 계급, 직업을 막론하고, 처녀, 하녀, 과부를 막론하고, 향수, 화장품, 화장수, 의치, 가발을 통해 유혹하거나 속여서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결혼은 무효다."

 여기서 이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흰색 화장분 위에다 빨간 루즈를 칠하는 유행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치에 달했다는 점을 지적해 볼 필요가 있다. 1792년에 나온 영국의 신사잡지Gentlemen's Magazine는,

  "양털 같은 흰 머리와 불 같은 빨간 얼굴을 한 여자들은 마치 껍질 벗긴 양을 닮았다."

라고 적었다. 그런 다음 이 기사는 남성 독자들을 위해 남자가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독신 여자가 이런 유행을 따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남편을 얻어야 하니까. 그러나 이러한 경박함은 결혼한 여자 체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화장하는 것이 극에 달했던 이 시기 이후에는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로 점잖은 시대가 왔다. 

 19세기 후반경까지는 루즈, 분, 립스틱 등 6천년간 사용된 기본 화장품들이 유럽에서 거의 사라졌다. 이러한 소강 상태 동안에 당시 한 패션 잡지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얼굴과 입술에 색을 칠하는 것은 무대에 서는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따금씩 마음을 잘못 먹은 여자가 젊음과 건강의 안색을 대치하기 위해 빰에 색칠을 한다. 이것이 인위적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금방 알게 되고 그가 숨기려고 하는 바로 그 점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루즈와 립스틱이 다시 사용될 날이 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것은 1880년의 일이었다. 무대 여배우들이 쓰는 화장품은 옛날에 몇 세기 동안 그랬듯이 집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가까워지면서 프랑스인들이 앞장서서 화장품 사용을 완전히 부활시켰다.

 

 그 결과 현대 화장품 산업이 탄생했고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게에서 파는 유명 브랜드 제품의 범람이 이어졌다. 게르랭, 코티, 로저와 갈렛, 랑방, 샤넬, 디오르, 루빈스타인, 아덴, 레브론, 로더, 그리고 아본 등이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화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용사와 여자들을 도와 사상 최초로 안전한 화장품을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애교점과 콤팩트

 1600년대에 유럽은 사람의 외모를 망가뜨리는 천연두가 휩쓸었다. 전염병이 돌 때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곰보 자국은 대다수 유럽인들의 얼굴을 망쳐놓고 말았다. 

 

 별, 초승달, 하트 모양의 애교점은 한번에 12개 정도까지 붙이는데 천연두 자국으로부터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는 수단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즉 애교점의 유래는 천연두로 인한 곰보 자국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애교점(beauty spot)

 

  검은 실크나 벨벳으로 만들어진 점은 눈 근처, 입 주위, 뺨, 이마, 목, 그리고 가슴에 조심스럽게 붙여졌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붙였다. 어쨌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효과는 분명히 있어서 프랑스에서는 애교점이 파리(fly)를 의미하는 무셰mouche 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비상시에 갈아붙일 수 있는 애교점 상자를 사람들은 식사 때나 무도회에 가지고 다녔다. 이 상자는 작고 얕았으며 뚜껑에 거울이 붙어 있었는데, 오늘날 콤팩트의 원조였다. 애교점은 말없이 잘 통하는 언어로 발전했다. 여자 입 근처에 붙이는 점은 '기꺼이 놀아나겠다'는 표시였다. 오른쪽 뺨에 붙이는 점은 '결혼했다'는 표시이고, 왼쪽에 붙이면 '약혼했다'는 뜻이었다. 눈 구석에 붙이면 타는 듯한 열정이 있음을 의미했다.

점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애교점

 

  1796년에 애교점을 붙여야만 하는 의학적 필요성은 사라졌다. 영국 시골의사인 에드워드 제너가 8살난 시골 소년에게 우두를 맞힘으로써 천연두에 대한 백신을 시험했다. 소년에게는 곧 약간의 발진이 났으나 곧 사라졌다. 제너는 이번에는 더 위험한 천연두 주사를 놓았다. 이 아이는 면역이 되어 아무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최초로 백신을 만든 에드워드 제너

 제너는 이 과정을 우두를 의미하는 라틴어 박시니아vaccinia에서 따와서 백시네이션 vaccination이라고 불렀다. 백신 사용이 유럽 전체에 퍼져서 천연두가 사라지자 애교점은 실용적인 위장에서 미용상의 장식이 되었다. 미용으로 장식을 하게 되자 이번에는 연필로 그리는 애교점이 등장했다. 귀하게 생각하던 애교점 상자는 이제 텅 비게 되었으므로 콤팩트 분을 넣는 상자로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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