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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문 역사

서양생활사 - 면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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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개껍데기 면도기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때 원시인들이 수염을 자라는대로 길렀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고고학자들은 남자들이 2만년 전부터 면도를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동굴벽화는 수염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같이 묘사하고 있으며, 묘터에서는 최초의 면도기로 쓰였던 날카로운 돌조각과 조개가 발견됐다. 그리고 철과 동을 가공하는 기술이 완성된 직후부터는 이것을 재료로 면도기를 만들었다.

면도기와 거울

 역사를 통하여 남자 얼굴에 난 털과 그 처리방법은 왕과 농부, 군인과 상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왕족은 청동 면도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그리스인들은 날마다 면도를 했고, 로마인들은 면도하는 것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나 전쟁터에서는 면도칼을 썼다. 왜냐하면 수염을 기르는 것이 육박전에서는 불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발사라는 뜻의 영어 '바버(Barber)'는 로마인들이 수염을 일컬을 때 하는 말 '바르바(barba)'에서 유래했다.

인디언들은 조개껍질을 면도기로 썼다

 

 북미 대륙에서는 인디언들이 조개껍질을 집게로 사용해서 수염을 하나씩 뽑았다고 전한다. 남북전쟁 당시 포토맥의 남군 지휘관이었던 앰브로스 에브렛 번사이드 장군은 면도칼을 선별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귀를 따라 뺨까지 이어지는 무성한 구렛나룻이었는데, 이것은 유행이 되어 번사이드(burnsides) 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20세기로 바뀌면서 이 말은 언어학적인 자리바꿈을 하게 되어 사이드번(sideburns)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칼 면도기

 번사이드 장군 시대까지 면도칼은 고대 이집트 시대 이래로 겉모양에 있어서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더 안전한 면도칼을 만들려는 시도는 몇 차례 있었다.

 

    질레트 면도기

 오랫동안 젊은 남자 혹은 여자들은 날카로운 면도칼로 안전하게 면도하는 방법을 살을 베어가면서 고통스럽게 배웠다. 안전 면도기로 특별히 제작된 최초의 도구는 직업 이발사 쟝 자크 페레에 의해 처음으로 발명되어 1762년에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거기는 한쪽 날을 따라 철제 안전장치가 달려있어서 실수로 칼이 미끄러져 살을 베지 않도록 했다. 약 7년 후 영국 셰필드에서는 더 개선된 디자인이 등장했는데, 무게도 가볍고 쓰기도 간편했다. 오늘날의 T자형의 면도기는 1880년대 미국에서 처음 나온 발명품인데 날을 교환할 수가 없어서 정기적으로 바꿔야만 했다.

 정말 혁신적인 개혁은 세일즈맨이면서 발명가였던 킹 질레트 라는 사람에 의해 거의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 

면도기를 발명한 킹 질레트

 1855년에 위스콘신 주 퐁뒤락에서 태어난 질레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귀족적으로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성공하려는 집념이 강했다. 그가 애초부터 더 나은 면도기를 개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 그의 원래 포부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상에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1894년 그는 두서없는 사회주의 개혁의 청사진인 '인간의 흐름' The Human Drift 이라는 책을 발간해 세계인들에게 증정했다. 오늘날 면도를 하는 모든 남녀들은 이 책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을 아마 감사해야 할 것이다.

질레트 면도기 지면 광고

 질레트는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1회용 병뚜껑을 발명한 그의 친구 윌리엄 페인터는 실패한 작가이자 세일즈맨인 질레트에게 병뚜껑처럼 한 번 쓰고 버린 후 갈아 낄 수 있는 물건을 고안해 보라고 제안했다.

 

  질레트는 이 제안에 마음이 끌렸다. 1년 동안 그는 매사추세츠 주 브룩라인에 있는 집에서 알파벳 순서대로 자주 쓰는 집안용품과 사무용품을 계속해서 정리했다. 1895년 어느 날 아침, 질레트는 면도를 하다가 면도날이 너무 무디어진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이것을,

 '내가 그날 둥지에 앉는 새처럼 가볍게 내 눈으로 면도날을 바라보면서 면도기를 들고 서 있을 때 질레트 면도기와 1회용 면도날이 탄생하게 되었다.'

 라고 훗날 적었다.

질레트 면도기

 

생각은 단순했지만 기술을 완성하는 데는 6년 이상이 걸렸다. 질레트가 접촉한 도구제작자들은 작고, 값싸고, 종이처럼 얇은 면도날은 만들 수가 없다고 말했다. MIT에 있는 엔지니어들은 그 계획을 포기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의 누름단추를 발명한 윌리엄 니커슨이라는 MIT교수가 1901년에 그와 공동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공동작업 첫번째 열매는 1903년에 출고하였다.  한 개에 5불짜리 면도기 51개와  1회용 면도날 168개였다. 면도기의 안전성과 편리함에 대한 소문이 너무나 빨리 퍼져서 제작이 수요를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1906년에 미국인들은 30만 개의 면도기와 50만 개의 면도날을 구입했고, 모든 상품 포장에는 질레트의 사진과 싸인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미국 정부는 미군 전체가 면도하는 데 충분한 물량인 350만 개의 면도기와 3천6백만개의 면도날을 주문했다. 전쟁으로 세계 각처의 젊은이들이 질레트의 발명품을 처음 써보게 되었고, 그들이 전쟁터에서 고국으로 돌아갈 때 질레트 면도기와 1회용 면도날을 계속 공급받기를 원했다.

 킹 질레트는 백만장자가 몇 번이고 될 정도로 돈을 많이 번 후 1931년에 은퇴했다. 바로 그 해에 면도날은 이것이 누려온 긴 독점의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강력한 도전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전기 면도기였다.

 

    전기 면도기

 제이콥 쉬크라는 사람은 미군에 복무하면서 질레트 면도기와 면도날을 지급받았고 이 제품에 아무 불만이 없었다. 이 면도기로 그는 언제나 말끔하고 편리한 면도를 할 수 있었다. 물, 비누, 셰이빙 크림이 없는 경우나 겨울에 찬 물을 데울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전쟁이 끝나고 쉬크는 전기 모터로 작동하는 소위 '건조한 면도기'를 발명하기 시작했다.

 튼튼하고 강력한 모터는 모두 무겁고 크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5년 동안 쉬크는 작은 전기모터를 직접 완성하는 일을 했고, 이것을 1923년에 특허 신청했다.

쉬크 면도기의 창업자 제이콥 쉬크

 그러나 계속된 장애가 그의 노력을 방해했다. 그에게 재정적 보조를 해주는 사람들은 전세계 수백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질레트의 면도기와 면도날로 만족스러운 면도를 하고 있었다. 전기 면도기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쉬크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을 저당 잡히고 빚더미에 올랐고, 최초의 전기 면도기를 25불이라는 비싼 가격으로 1931년 경제공황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내놓았다.

 

 첫해에 제이콥 쉬크는 단 3천개의 면도기를 팔았을 뿐이었다. 그 다음해에 그는 약간의 이윤을 남겨 이것을 전국적인 광고에 재투자했다. 그런 정책을 해마다 반복하여 1937년에 그는 미국, 캐나다, 영국에서 거의 2백만 개의 전기 면도기를 팔았다. 전기 면도기는 삶의 필수품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20세기의 전기 발명품 중의 하나였고, 제이콥 쉬크는 면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쉬크가 30년대에 질레트라는 이름과 경쟁한 것처럼 40년대에는 레밍턴과 선빔이라는 이름들이 쉬크와 경쟁했다. 레밍턴은 1940년대에 2헤드 면도기를 도입함으로써 또하나의 역사적인 전환기를 마련했다. 듀얼(dual)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면도기는 오늘날 멀티헤드 면도기 쪽으로의 경향을 선도했다. 그 해에 레밍턴은 여자만을 위한 전기 면도기를 내놓음으로써 작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여자들은 수세기 동안 원하지 않는 털을 뽑고, 왁스칠하고, 탈모하고, 밀어왔으면서도 기록된 면도의 역사에서는 거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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