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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 상식

측천무후/콜럼버스/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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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측천무후는 당나라 태종의 후궁이었다.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해 가장 낮은 재인의 신분으로 남아 있던 무측천은 태종이 죽자 감업사에 갇혀 살았다. 감업사는 황제가 죽으면 그 후궁들이 들어가 죽을 때까지 살던 곳이다.

 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고종은 세자 시절부터 마음에 있던 무측천을 데려다가 후궁으로 삼았다. 후궁이 된 무측천은 승승장구하여 황후의 자리에 올라앉게 되었고, 결국에는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스스로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황족을 탄압했는데, 690년 혁명을 단행하여 국호를 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콜럼버스

 콜럼버스는 지구가 공처럼 생겼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인도를 가기 위해 서쪽으로 계속 가면 된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지구가 원반처럼 생겼다고 믿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말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콜럼버스를 조롱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에는 지구가 둥글게 생겼다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지구의 크기를 놓고 논란이 일었던 것뿐이었다. 지구가 크면 클수록 서쪽으로 도는 인도 항로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지구 둘레를 28,000㎞로 계산했다. 고대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방식으로 계산하여 얻은 이 수치는 실제보다 무려 12,000㎞나 짧게 계산된 것이었다. 피렌체의 수학자 파울로 토스카넬리의 방식대로 계산한 지구둘레는 39,000㎞였다. 실제의 거리에서 약 1,000㎞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계산이었다. 이 계산이 옳다고 믿었던 포르투칼과 이탈리아의 왕들이 콜럼버스를 후원하지 않았다. 종래의 인도 항로가 훨씬 가깝기 때문에 굳이 멀리 서쪽으로 돌아서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쓸데없이 돈을 더 많이 써가면서까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만일 신대륙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유럽으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한니발

BC 218년 가을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6만 명이 넘는 대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알프스를 넘은 최초의 군대였다. 이탈리아는 바다만 지키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를 잘 아는 한니발은 바다가 아니라 육로를 택했다. 알프스는 험한 산맥인 데다가 가을에 넘기는 더욱 어려웠다.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는 알프스를 넘으면서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바위를 뚫고 지나가야 했다. 이때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대가 사용한 것이 식초와 불이었다. 바위 위에 통나무를 놓고 불을 붙여 달군 뒤에 식초를 부었다. 석회암인 이 바위들은 조각조각 부서져 한니발의 군대는 힘들지 않게 이탈리아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실은 굉장히 힘든 행군이었다. 알프스를 넘었을 때 한니발의 군대도 손실이 매우 컸다. 40마리의 코끼리 가운데 1마리만이 살아남았고, 병사는 2만6천 명만이 살아남았다. 스물아홉살의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는 동안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단 하루의 전투에서 5만 명의 로마 군사를 죽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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