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으로부터 해방
성경 구절 중에 이런 게 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오리라." 옛사람들에게 밤이란 그냥 일할 수 없는 시간에 불과했다.
18세기 후반까지 실내 조명에 있어서 실질적 혁신은 없었다. 그러나 단지 잠을 자거나 할일 없이 보내기에는 밤이 너무 긴 나머지 인간은 집안을 밝힐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오일 램프였다. 약 5만년 전 크로마뇽인은 동물기름으로 불을 붙인 섬유 심지가 계속해서 타는 것을 발견했다. 이 돌램프는 삼각형이었고, 심지는 접시처럼 움푹 파인 곳에 역한 냄새가 나는 동물기름과 함께 담겨 있었다. 이 간단한 원리는 수천년 동안 이어졌다.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 이집트인들은 집과 산전을 오일램프로 밝혔다. 이제 램프는 조각된 토기였고 종종 장식으로 쓰였다. 심지는 파피루스로 만들었다. 가연성 물질은 냄새가 덜 나는 식물성 기름이었다. 훗날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배에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는 뱃밥이나 아마포로 만든 심지에 청동으로 만든 램프를 선호했다.
냄새가 없고 비교적 깨끗하게 타는 기름이 19세기에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사람들은 싸고 풍부한 물질이면 무엇이든지 태웠다. 동물성 지방은 냄새가 났다. 생선 기름도 밝은 빛을 내기는 했지만 냄새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모든 동물성과 식물성 기름은 먹을 수 있는 기름이었다. 심각한 식량난을 겪던 시대에는 기름이 램프에 사용되기보다는 요리냄비에 들어가기 바빴다.
오일램프는 또다른 문제를 낳았다. 심지가 스스로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따금씩 집게로 들어올려 거슬린 꼭지를 잘라야 했다. 로마시대 때부터 17세기까지 오일램프에는 끈이나 체인으로 집게와 가위가 매달려 있었다. 밤새도록 일하기 위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역사상 최초의 고강도 램프라 할 수 있는 것을 발명했다. 올리브 오일과 대마 심지를 넣은 유리 실린더를, 물로 가득 채운 유리 구에 넣으므로 해서 불꽃이 엄청나게 커졌다. 물론 오일 램프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양초혔다.
양초를 먹었던 사람들
양초는 가정욜 조명기구로는 비교적 늦게 등장했다. 양초에 관한 최초 기록은 1세기의 로마 문서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발명품은 로마인들에게 오일램프보다는 못한 대치물로 생각됐다. 그 당시 오일램프는 정교한 장식예술품이었다. 동물이나 식물 지방에서 뽑은 거의 무색, 무취의 고체 추출물인 수지로 만들어진 양초는 또한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굶주린 군인들이 망설이지 않고 배급받은 양초를 먹었다는 기록이 수없이 많다. 몇 세기 후 한번에 몇 달 동안 고립되었던 영국 등대지기들에게 있어 양초 먹는 일은 거의 공인된 직업적 관행으로 굳어졌다.
가장 비싼 영국 수지양초도 30분마다 심지를 잘라 주는 것이 필요했다. 심지를 자르지 않은 양초는 원래 밝기의 몇 분의 일의 밝기만을 냈고, 불꽃이 낮으면 남아있는 수지도 빨리 녹아버렸다. 사실 신경쓰지 않고 놓아둔 양초에서는 수지의 5%만이 실제로 연소되었다. 나머지는 타지도 않고 그냥 흘러내렸다. 심지를 적절히 잘라주지 않으면 1파운드 무게가 나가는 수지 양초 8개가 30분도 못 되어 타버렸다. 매주 수백 개의 수지 양초를 태우는 성에서는 '심지 자르는 하인들'까지 두었다.
심지 자르는 데는 기술과 판단력이 필요했다. 새뮤얼 존슨의 전기를 썼던 스코틀랜드의 변호사이며 작가인 제임스 보스웰은 양초 심지를 잘 잘라야 했으나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793년 이렇게 썼다.
"나는 밤늦게까지 앉아서 많은 분량의 글을 썼다. 새벽 2시에 나는 잘못해서 촛불을 꺼뜨렸다. 그리고 다시 붙이지 못했다."
집안의 불이 모두 꺼지고 난 다음 다시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마찰 성냥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역작 돈키호테(Don Quixote)에서 불씨 조각으로 성냥불을 붙일 때 짜증나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심지를 자르다가 불은 종종 꺼졌고, 그래서 '심지를 자르다(snuff)' 라는 말이 '불을 끄다(extinguish)'라는 의미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17세기가 될 떄까지만 해도 극단 단원 중에는 '심지 자르는 소년'이 있었다. 이 분야에 기술을 가진 그는 가장 감정이 복받치는 클라이맥스에도 들어와서 연기가 나는 촛불의 심지를 끌 수 있었다. 들어올 때는 사람들이 그를 못보아도 그가 계속 심지를 잘 자르면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 자르는 기술은 17세기 후반에 증발하는 밀랍양초가 널리 사용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밀랍은 값이 수지의 3배였고 불꽃도 더 밝았다. 1667년 영국 일기작가 새뮤얼 페피스는 밀랍 양초를 런던의 드루리 레인 극장에 사용하고부터 무대가 '천배나 더 밝고 빛났다'고 기록했다.
로마 천주교는 밀랍 양초를 이미 쓰고 있었다. 그리고 부유층들도 화려한 분위기가 필요한 특별한 경우에 사치스러운 밀랍양초를 썼다. 영국의 한 대가문의 기록을 보면 1765년 한 해 겨울 동안 한 달에 100파운드 이상의 밀랍양초를 소비한 것으로 나와있다. 다음 세기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사용한 사치스러운 양초에는 영국산 광택 백색 밀랍 양초, 딱딱한 중국산 황색 야채 수지 양초, 미국 북동 해안에서 나온 초록색 소귀나무 양초가 있었다.
가스등
3000년 전 중국인들은 소금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기 위해 천연가스를 태웠다. 그리고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부족들이 천연가스가 나오는 주변에 신전을 짓고 천연가스에 불을 붙여 영원한 불꽃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스로 가정에 불을 밝히는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이것은 벨기에 화학자 장 밥티스타 반 헬몬트가 처음으로 석탄 가스를 만든 지 거의 200년 후였다. 기초금속을 변화시켜 금으로 만드는 '현자의 돌' 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과학자이자 신비주의자였던 헬몬트는 연금술과 화학자 앙뚜완느 라부아지에를 고무시켜 파리의 거리를 가스등으로 밝힐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라부아지에는 1780년에 원시적인 가스등을 만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 그는 불란서 혁명 기간 중에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1813년에 런던에서 세계 최초 가스회사가 설립되고 나서야 가정용 가스등이 현실화되었으며 빠르게 발전했다. 독일 과학자 로베르트 폰 분센은 가스를 공기와 미리 섞음으로써 순수한 가스불꽃이 반짝거려서 신경 쓰이게 하던 것을 감소시켰다. 가스의 조명도를 크게 강화하기 위해 분센의 제자는 1885년 가스 맨틀을 만들었다. 토륨과 질산 세륨에 적신 실로 만들어진 맨틀은 처음에 불을 붙이면 실이 다 타버리고 탄화 합성물의 뼈대만 남아 밝은 백녹색 빛을 냈다. 1860년까지는 가스가 가정, 공장, 거리를 밝혔다. 가스는 너무나 깨끗하고 효율적인 값싼 조명의 원천이어서 다른 조명수단이 가스등을 대치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전깃불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등의 아버지이지만 그의 백열등이 최초는 아니다. 영국 발명가들은 에디슨이 전구를 완성하기 반세기 전에 벌써 전깃불을 실험해 왔다.
백열등은 진공 상태의 유리방 속에서 전류가 지나갈 때 백색으로 빛나는 필라멘트가 기본요소이다. 영국 조셉 스완과 미국 에디슨은 둘 다 탄소를 필라멘트로 사용할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스완은 1878년에, 에디슨은 1879년에 특허 등록을 냈다. 그러나 전기배급 체계를 세우면서 백열등은 실험실과 가정, 그리고 거리에서 이용되기 시작했다.
뉴욕 펄 스트릿 전기국은 처음으로 소비자들의 요구에 의해 공공 전기를 보급한 첫번째 회사가 되었다. 1882년 12월 까지는 203명의 맨해튼 전기 소비자들이 개인 단위, 혹은 회사에서 3,144개의 전등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일하면서 살아갔다.
이들 특권을 받은 선구자들은 평균 전구 수명 150시간(오늘날은 2000시간)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1884년 초 에디슨은 400시간짜리 전구를 완성했고, 2년 후에는 1200시간을 시족하는 전구를 만들었다.
전깃불은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느린 속도로 보급되었다. 사람들은 전구가 빛나는 것을 보기 위해 전시장으로 몰려가는 등 호기심은 있었지만, 직접 자기 집에 전기를 설치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7년이 지났는데도 에디슨 회사 고객은 겨우 203명에서 703명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전구는 그냥 사라질 발명품이 아니었다. 전기료가 내려가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주문을 폭주하게 만든 것은 전기조명을 써 본 사업체와 개인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평판이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당시에는 1만명의 사람들이 전깃불을 사용했으며, 10년 후에는 무려 3백만, 그리고 계속 증가했다.
토머스 에디슨과 조셉 스완은 특허법 위반으로 서로를 고소했지만, 마침내 서로 손을 잡고 전기회사를 같이 차렸다.
네온등
'새로운 것' 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neos에서 이름을 따온 무색, 무취, 무미의 가스 네온은 1898년에 2 명의 영국 화학자 윌리엄 램제이와 모리스 트래버스에 의해 발견됐다. 그들은 가스가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적황색 빛이 신기해서 화학적으로 이 색을 바꿔보려고 했다. 그러나 1909년 네온 튜브를 완성하여 다음해에 파리 그랜드 펠리스를 밝히는 데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물리학자 죠르쥬 끌로드였다. 끌로드는 딱딱하고 고정된 필라멘트 대신에 가스를 사용하게 되면 네온등이 길이와 모양에 상관없이 빛난다는 것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네온의 광고적 가치를 즉시 간파했다. 광고업자 자끄폰스크는 끌로드를 설득해서 자기 고객의 사업명을 네온 튜브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1912년에 최초의 네온사인이 파리의 몽마르뜨 거리를 밝혔다. 이것은 'The Palace Hairdresser(궁전미용사)' 라고 쓰여져 있었고 적황색으로 빛났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가스를 바꾸고 튜브에다가 가루를 집어넣으면 온갖 무지개 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훗날에야 발견하게 된다.
형광등
거의 60여년 동안 미국 가정을 밝혀 온 백열전구는 1930년대 형광등이라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만난다. 둘 사이의 경쟁은 결국 무승부로 끝나서 똑같은 방안에 두개의 전구가 동시에 밝혀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형광등의 강력한 빛은 화장실에서 돋보였고, 백열등의 부드러운 빛은 침실에서 우세했다. 그리고 부엌에서는 형광등과 백열등이 같이 불을 밝혔다.
형광등을 만드는 것은 우라늄의 방사능을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앙뚜안는 앙리 베끄렐이 처음으로 시도했다. 1859년에 벌써 그는 전류를 받을 경우 빛을 내는 화학물질(포스포phosphor)로 유리관 내부를 칠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곧 전기장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수십 개의 가스와 광물이 발견됐다. 램제이와 트래버스가 네온을 발견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였다.
최초로 실용화된 형광등 개발은 1934년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아더 콤튼 박사에 의해서였다. 낮은 볼트에서 작동되는 형광등은 백열등보다 더 경제적였다. 그리고 백열등이 빛이 아니라 열을 내는 데 80%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에 비해 형광등은 에너지 효율이 너무나 높아서 '차가운 불치' 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많은 사람들이 형광등을 처음 본 것은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장에서 였다. 이곳에서 제너럴 일렉트릭사는 백색과 칼라 형광등을 전시했다. 15년이 못되어 형광등은 미국에서 주된 조명 기구로서 백열등을 약간 앞섰다. 형광등의 승리는 가정에서 형광등의 강한 불빛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업장에서 조명 비용을 절감하려는 사업주들의 계산 때문이었다.
플래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플래시는 원래 20세기 초에 '전기화분' 이라는 신상품으로 출발했다. 미국 사람들이 전기화분을 열성적으로 구입했더라면 플래시는 발명되는 데 훨씬 오래 걸렸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아키바 호로비츠는 1890년대에 뉴욕에 도착하면서 이름을 콘라드 휴버트라는 미국식으로 바꾸고 나중에 라오오넬 기차를 발명하게 된 조슈아 라이오넬 코웬 밑에서 일했다. 코웬은 이미 전기 초인종(종소리가 너무 길어서 사람들이 기피했음)과 전기 선풍기(바람이 너무 약했음)를 발명했다가 포기한 전력이 있었다. 콘라드 휴버트를 고용할 당시 코웬은 막 전기화분을 완성해 놓고 있었다. 전기화분은 날씬한 건전지를 튜브에 넣고 끝에 전구를 단 장치였다. 튜브가 화분 중간으로 올라와서 식물을 비추어주게 되어 있었다.
휴버트는 전기화분의 상업적 가능성을 믿었고 주인에게 특허권을 자기에게 팔라고 설득했다. 신상품이 구매객을 끌어들이지 못하자 휴버트는 재고가 엄청나게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투자한 돈의 일부라도 건질 생각으로 그는 전등을 화분에서 분리하여 실린더의 디자인을 더 길게 해서 자기 명의로 '포터블 전깃불'의 특허를 따냈다.
손목만 움직이면 원하는 방향으로 빛을 비출 수 있는 편리한 전등은 너무나 잘 팔려서 콘라드 휴버트는 에버레디 플래시라이트 회사를 차렸다. 1928년 사망할 때 휴버트는 6백만불을 자선기금으로 남길 수 있었다. 조슈아 라이오넬 코웬은 조수였던 휴버트의 성공에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 역시 여러 개의 발명품이 실패한 후, 거의 바람이 나오지 않는 선풍기에 달았던 작은 모터를 미니 기차 세트에다가 장착하여 팔아 횡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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