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미
1917년 샌프란시스코의 에드윈 콕스는 집집마다 방문하여 새로 나온 과대선전된 알루미늄 식기를 팔았으나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서부연안의 주부들은 식기 기술이 낳은 최신상품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콕스는 상품의 시범을 보여주러 부엌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상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기존 세일즈맨들의 방식대로 알루미늄 상품을 선전하게 해주면 공짜로 선물을 주겠다고 장래의 고객들을 유혹할 결심을 했다.
경험을 통해 콕스는 주부둘의 가장 큰 불평이 음식이 바닥에 달라붙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강면의 연마성과 비누의 세척력을 가진 수세미를 개발할 수는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
자기 부엌에서 콕스는 작은 정사각형의 강면 수세미를 비누용액에다 적셨다. 수세미가 마르면 다시 적시는 과정을 반복하여 수세미에 말린 비누가 배어 있도록 만들었다. 주부들을 방문하면서 그는 주부들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하고 판매를 높인 것은 바로 아직 이름도 붙이지 않은 수세미인 것을 발견했다. 주부들은 모두 한 개의 샘플을 공짜로 받았다. 대부분의 주부들은 더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몇 달이 안되어 판촉물 수세미에 대한 수요가 콕스의 공급능력을 앞질렀다. 에드윈 콕스는 냄비와 팬 장사를 그만두고 수세미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신상품을 소개할 기발한 이름이 필요했던 콕스는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주부, 즉 자기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의 아내는 '우리의 소스팬을 구한다(Save Our Saucepan)' 는 말을 줄여서 'S.O.S' 라고 이 수세미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이 글자가 바다에서의 조난 신호인 '우리 배를 구해주세요(Save Our Ship)'의 준말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콕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S.O.S는 두가지 점에서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국제 규약이 규정하는 모르스 조난 신호는 '우리 배를 구해주세요', '우리의 영혼을 구해주세요(Save Our Soul)', 혹은 다른 어떤 구조 요청의 표현을 축약한 말이나 준말이 아니다.
S.O.S
화가였다가 발명가가 된 뉴욕 대학의 미술 교수 새뮤얼 모르스가 1835년에 전신 기호를 고안했을 때 비교적 외우기 쉽도록 점과 줄을 합성하여 만들었다. 몇년 후 국제 위원회에서 위기의 순간에 기억나기 쉽고 모르스 코드 지식이 별로 없는 아마추어라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조난 신호를 정하려고 했을 때 사람들은 3 개를 간단하게 합성하기로 결정했다. 즉, 3개의 신호로 나타내는 3글자를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 생각에 3이라는 숫자는 어느 곳에서나 좋아하는 숫자 같았다.
모르스 코드에서 3개의 같은 표시로 나타내는 알파벳은 두 글자 밖에 없다. 3개의 줄은 O를, 3개의 점은 S를 나타낸다. 그래서 국제 조난 신호는 'OSO' 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줄은 점보다 전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전기신호다. 긴급 메시지는 가능한 한 빨리 전달되어야 하고 송신장치의 에너지를 가장 적게 소비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3글자로 된, 3개의 점과 3개의 줄로 이루어진, 빠르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신호는 'SOS'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글자 사이에 구둣점도 없었다. 그러나 콕스 부인의 실수가 수세미 판매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마찰성냥
인간의 시조인 직립원인 호모 에렉투스는 나뭇가지 두 개를 서로 문질러서 생긴 마찰을 통해 우연히 불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1천 5백만년이 지나야 영국의 화학자인 존 워커가 거친 표면에 성냥을 마찰시킴으로써 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닉하게도 우리는 존 워커보다는 직립원인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워커 또한 우연히 불을 발견했다.
성냥을 만들려는 시도는 다른 발명가들과 과학자들도 많이 해왔다. 주목할 만한 최초의 마찰 성냥은 보일 성냥이다.
1669년에 함부르크 출신의 연금술사 헤니그 브란트는 비금속의 합성물을 변화시켜 금을 만드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금 대신 만든 것은 인이라는 원소였다. 실망한 그는 자신의 발명을 무시했으나 영국 물리학자 로버트 보일이 이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1680년에 보일은 인을 입힌 거친 종이와 항을 끝에 바른 나무 조각을 고안했다. 나무조각을 접힌 종이 사이로 그었을 때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것은 당시는 인이 귀해 많은 양의 성냥을 만들 수 없었다. 대중들에게는 비싼 신발명품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부싯돌을 쇠에 부딪혀 그 불꽃으로 불을 피웠는데 성냥의 존재를 알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1817년에는 마찰 성냥을 만들려는 더 극적인 시도가 있었다. 어느 프랑스 화학자가 대학 동료들에게 '에테르(공기 같은)성냥'을 시범보였다. 이것은 공기에 노출될 때 점화하는 인 화합물로 처리한 종이조각이었다. 이 가연성 종이는 '성냥'이라고 불리는 진공유리관에 넣아서 봉해졌다. 성냥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유리를 깨고 서둘러 불을 붙여야 했다. 왜냐하면 종이가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성냥은 공기 같았을 뿐만 아니라 단명했다. 그 인기 또한 단명했다. 이때 존 워커가 등장한다.
1826년 어느 날, 스톡튼 온 티스에서 약제상을 경영하던 존 워커는 실험실에서 새로운 폭발물을 개발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화학 혼합물을 젓던 그는 눈물 모양의 방울이 나뭇가지 끝에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빨리 떼내기 위해 그는 실험실의 돌바닥에다 대고 문질렀다. 나뭇가지는 불이 붙었고 마찰 성냥은 불꽃 속에서 우연히 탄생한 것이다.
워커의 저널에 의하면 나뭇가지 끝에 있던 방울에는 인이 아니라 황화 안티몬, 염소산 칼륨, 그리고 녹말이 들어있었다. 존 워커는 3인치짜리 마찰 성냥을 만들어 거친 종이 조각 사이에 넣었다가 꺼내어 점화함으로써 친구들을 즐겁게 했다. 연금술사 헤니그 브란트가 2세기 전에 했듯이 말이다.
존 워커가 자기 발명품으로 돈을 벌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특허를 낸 적도 없다. 그러나 그가 런던에서 보인 3인치짜리 성냥의 시범을 구경하던 새뮤얼 존즈는 이 발명품의 상업적 가능성을 깨닫고 성냥 사업을 차렸다. 존즈는 자신의 성냥을 '루시퍼'라고 불렀다. 런던 사람들은 성냥을 무척 좋아했고, 기록에 의하면 성냥이 생기고 나서부터 모든 종류의 담배 소비가 크게 증가했다.
처음 나온 성냥은 폭죽과 같은 불꽃과 역한 냄새를 풍겼고 성냥갑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가능하면 가스를 들이마시지 마시오. 폐가 약한 사람은 루시퍼를 절대로 사용하지 마시오'
당시 사람들은 담배가 아니라 성냥이 건강에 해롭다고 믿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제 루시퍼 냄새가 너무 역겹다고 느꼈다. 1830년 파리 화학자 샤를르 소리아 박사가 인을 기초로 한 인화합성물을 재구성해 성냥 냄새를 없애고 연소시간을 길게 했다. 그러나 인악이라고 알려진 치명적인 유행성 질병을 뜻하지 않게 생기게 했다. 인 성냥은 대량으로 제조되었다. 수백명의 공장 노동자들이 선체의 뼈 부분, 특히 턱뼈 조직을 파괴시키는 질병인 인악에 걸렸다. 성냥 대가리 부분을 입에 넣었던 아기들은 유아 골격 기형을 발생시키는 증상에 걸렸다. 한 갑 분량의 성냥개비 대가리에서 인을 떼내도 자살 혹은 살인을 할 만큼 충분한 양이 나왔다. 자살과 살인 사건이 보고된 적도 있었다.
직업병으로서 인악은 1911년 다이아몬드 성냥회사에서 비독성 성냥을 개발할 때까지 영국과 미국 공장 노동자들을 고롭혔다. 이것에 사용된 해가 없는 화학물질은 삼이황화물이었다.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제스처로 다이아몬드 회사에서는 특허권을 포기하여 경쟁회사들로 하여금 비독성 성냥을 도입하도록 했다. 이로인해 다이아몬드 회사 측은 태프트 대통령으로부터 공개적인 찬사를 들었다. 이 회사는 나중에 직업병을 근절한 공로로 권위있는 상을 수상했다.
다이아몬드 성냥은 또 다른 돌파구를 마련했다. 프랑스 인 성냥은 조금만 마찰을 가해도 불이 붙어서 수많은 돌발 화재를 야기시켰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의 많은 화재는 밤에 쥐들이 성냥개비 대가리를 갉아서 발생한 것이었다. 다이아몬드 제조법은 성냥 점화 포인트를 100도 이상 높였다. 실험을 해본 결과 쥐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비독성 성냥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안전성냥
독일 화학교수 안톤 폰 쉬로터가 1855년에 발명한 안전 성냥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당시 다른 성냥들과 달랐다. 이 성냥은 가연성분의 일부가 성냥개비 대가리 부분에, 또 다른 일부가 성냥갑 겉 표면에 있었다.
우발사고로 화재가 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초기 성냥 제조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1892년에 펜실베니아 주 라이마 출신의 변호가 조슈아 푸시가 종이성냥이라는 편리한 상품을 발명했을 때 그는 주의사항을 뻔뻔스럽게 무시하고 말았다. 푸시의 종이 성냥갑에는 50개의 성냥이 들어있었고 성냥을 긋는 표면이 덮개 안에 있었다. 그래서 스파크가 자주 일어나 다른 성냥에가지 불이 붙었다. 3년 후 다이아몬드 성냥회사에서는 푸시의 특허를 사서 성냥을 그어대는 표면을 성냥갑 밖으로 옮겼는데 이 디자인은 그 후 100년 동안 그대로였다. 종이성냥 제조는 어느 주조회사가 자신의 상품을 선전하기 위해 5만 개의 종이성냥을 주문하면서 대량사업으로 발전했다. 전에는 손으로 인을 찍어, 말리고 이것을 조합하고, 성냥갑에다 붙였으나 주문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성냥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야 했다.
주조회사의 주문으로 인해 성냥갑 표지에 광고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콤팩트하고, 갑 싸고, 외국에는 거의 없기 때문에 종이 성냥은 광고 영역에도 이용되었다. 1940년대 미군 심리전 분과에서는 사기를 진작시키는 메시지를 종이성냥에 담아 2차 대전 초기에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점령당한 나라들에 보냈다. 표지에 메시지가 적힌(버머어, 중국어, 그리스어,불어, 스페인어,네덜란드어,이탈리아어,영어) 수백만의 종이성냥갑이 연합군 비행기에 의해 적군의 전선 후방에 투하되었다. 그리고 필리핀을 침공하기 전에 원주민의 사기가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을 때 미군 비행기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담은 수백만 개의 성냥갑을 뿌렸다.
'나는 돌아올 것입니다 - 더글러스 맥아더'
일회용 종이컵
일회용 식수컵과 개인용 아이스크림 용기로 너무나 요긴한 작은 종이컵은 어떤 남자가 전혀 다른 제품을 판매하려고 애쓰다가 생겨났다. 그가 팔려는 제품은 바로 식수였다. 1센트짜리 식수는 결코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이 물을 담기위해 특별히 고안된 일회용 컵은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되었다.
종이컵은 1907년부터 시작된다. 야심만만한 휴 무어는 순수하고 차가운 식수를 판매할 수 있는 자기로 만든 판매기를 생산했다. 오늘날 사무실에서 볼 수 있는 유리 탱크 쿨러와 비슷하게 생긴 무어의 페니 물 판매기는 3단으로 구성되었다. 상층부는 얼음, 중간은 물, 그리고 하단부는 버리는 컵을 담는 곳이엇다. 기계마다 한번 쓴 위생겁을 재사용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판매되는 것은 물이었고 컵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뉴욕에 있는 주점반대연맹에서는 즉각적으로 무어의 물 판매기를 옹호하고 나섰다. 연맹에서는 매일 수천 명의 목마른 남자들이 단지 한 컵의 물만을 원하는데도 할 수없이 술집에 들어가서 '무서운 유혹'을 대면하게 된다는 광고를 실었다. 거리의 코너마다 물 판매기를 배치하게 되면 술을 끊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몇 개의 물 판매기가 뉴욕 시 전차역에 설치되었으나 아무도 무어의 물을 사먹지 않았다. 낙심한 무어는 자신이 최근에 설립한 뉴잉글랜드의 미국 급수회사를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하게 되었다.
기회는 공공 위생관 새무얼 크럼바인 박사의 도움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개인용 컵이 아니라 주석으로 만든 주둥이를 통해 물을 마셨다. 이 꼭지는 세척하지도, 소독하지도 않았으며, 병든 자나 건강한 사람 가릴 것 없이 사용했다. 크럼바인 박사는 벌써부터 공공 수도꼭지를 금하는 법을 강력하게 주장해 온 터였다. 기업가 무어와 대중의 건강을 염려하는 크럼바인은 서로 도울 수 있었다. 일회용 컵이 사용될 수 있는 조그만 기회가 온 것이다.
재정적인 후원은 무척 얻기 어려웠다. 무어가 접근한 모든 사람은 일회용 컵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에 콧방귀를 뀌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공 수도꼭지가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을 믿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무어는 오랫동안 식수꼭지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던 돈 많은 뉴욕 은행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즉시 20만불을 투자했다. 1909년 어느날, 거의 하룻밤 사이에 뉴잉글랜드의 미국 급수회사는 공공 컵 판매회사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회사가 성공할 수 있는 과학적인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양호했다. 그 해에 캔사스에서는 '결핵환자가 마신 컵으로 건강한 사람이 물을 마실 경우 질병이 전염될 수 있다' 고 결론 지으면서 식수꼭지를 폐지하는 최초의 주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라파예트 대학의 한 생물학 교수는 공공 수도꼭지에서 채취한 것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뒤 그 속에 엄청난 종류의 균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여러 주가 잇달아서 공동 수도꼭지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공공 장소에서는 개인용 식수용기를 사용하도록 권장하기 시작했다. 무어는 또 다시 회사 이름을 바꾸어 이번에는 개인용 식수 컵 회사로 바꾸었다. 철도, 학교, 사무실에서 일회용 컵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이제 일회용 컵은 건강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건강'은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되었고 무어는 3번쨰로 이름을 바꿔 회사 이름을 헬스컵으로 바꾸었다. 무어가 헬스컵이라는 이름에 싫증이 나서 위생적인 냄새가 덜 나는 이름으로 회사 이름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헬스컵에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딕시 컵
휴 무어가 헬스컵을 만들고 있던 같은 건물에 딕시 돌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1919년 어느날 회사의 참신한 새 이름을 구상하고 있던 무어는 이웃 회사의 간판을 힐끗 보다가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뉴올리언즈에서는 10달러짜리 지폐를 딕스(dix: 불어로 '10'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강을 오르내리는 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0달러짜리 지폐를 딕시라고 불렀고 딕시를 벌기 위해 강 하구로 내려간다고 말하곤 했다. 어원학자들은 이렇게 해서 '딕시' 라는 말과 남부의 별명인 딕시랜드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믿고 있다.
휴 무어에게 있어서 딕시라는 이름은 그가 원하는 모든 성질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짧고, 인쇄했을 때 균형잡히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혀에서 쉽게 굴러나왔다. 무어가 전에 지었던 이름들이 대중의 정서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지어졌다면 딕시 컵 회사라는 이름은 순간의 영감에 의해 지어졌다.
이름의 변화는 아이스크림 산업이 아이스크림 소비를 증가시킬 방도를 찾고 있던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아이스크림은 그동안 대량으로만 판매되었다. 소다수와 캔디바는 혼자 먹을 수 있도록 판매되었지만 아이스크림만은 전 가족이 다 먹을 정도로 큰 포장으로만 판매되었다. 무어 회사는 납작하고 위로 열 수 있는 뚜껑이 원통 주위의 홈에 꼭 들어맞도록 만든 2.5 온스짜리 컵을 개발했다. 이 컵으로 인해 아이스크림 사업가들과 전세계의 아이스크림 애호가들에게는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아이스크림이 최초로 공급되게 되었다.
휴 무어의 컵과 아이스크림은 이제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1925년에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개인용 아이스크림을 주문할 때는 딕시컵이라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주문하게 되었다. 무어는 마침내 적절한 이름을 가진 적절한 상품을 착안하게 되었던 것이며, 또한 시기와 장소까지 그의 성공을 도와준 요인이 되었다.
'고전 인문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생활사 - 조명 (3) | 2023.10.24 |
---|---|
서양생활사 - 난방 (0) | 2023.10.22 |
서양생활사- 부엌의 역사 7 플라스틱 (0) | 2021.05.16 |
서양생활사 - 부엌의 역사6: 휘슬주전자/커피포트/파이렉스/전자레인지 (0) | 2021.05.15 |
서양생활사 - 부엌의 역사5- 4000년 빵굽는 역사 100년 동안의 혁신:토스터 (0) | 2021.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