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인문 역사

서양생활사 - 부엌의 역사6: 휘슬주전자/커피포트/파이렉스/전자레인지

728x90
반응형

휘슬주전자

 주전자는 휘슬과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에 사용되었던 물건이다. 고고학자들은 마야 유적에서 여러 개의 휘술 주둥이가 달린 2천년 된 질그릇을 발굴했다. 물을 한쪽 구멍으로 따르면 다른 구멍에서는 약하고 가는 휘파람 소리가 났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휘슬주전자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뉴욕 출신의 은퇴한 조리기기 회사 중역인 조셉 블록이 1921년 독일의 차 주전자 공장을 견학하다가 휘슬 주전자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으로 되어 있다.

 

 뉴욕에서 자란 블록은 요리가 끝나면 휘파람 소리를 내는 압력 감자 찜통을 디자인하는 것을 보았다. 수십년 후 독일의 웨스트팔리아의 주전자 공장에서 이 기억이 순간적으로 블록의 마음에서 되살아났고 변형물을 생각나게 한 것이다. 이 아이디어에 이끌린 독일 공장에서는 36개의 휘슬 주전자를 생산했다. 이것은 베를린에 있는 베르트하임 백화점에서 어느날 아침 9시에 판매에 들어가서 정오에 다 팔려버렸다.

 다음 해에 휘슬 주전자는 시카고 가정용품 전시회에 등장하면서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전시회에서 조셉 블록은 적어도 한 개의 전시용 주전자에서 계속 휘파람이 나오도록 했다. 이 소리 때문에 고객들이 다른 전시코너로 떠나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주문을 하고 난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갔다. 뉴욕의 와나메이커에서는 48개의 주전자를 갖다놓았는데, 소리내는 이 1불짜리 신상품이 다른 가정용품 코너에서 사람들을 무더기로 끌어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퇴했던 조셉 블록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에 35,000개에 달하는 주전자를 전국 백화점에 팔았다.

 

 블록은 자신의 발명품이 미국 부엌에 끼친 공로가 그다지 크지 않다고 스스로 인정했지만 휘슬주전자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동작을 멈춘 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를 띄게 했다. 마치 주전자가 소리를 낼 때 미소를 지었던 마야의 어린이들처럼.

 

커피포트

 커피는 서기 850년에 칼디 라는 에티오피아 양치기가 발견한 이래로 사람들이 애호하는 음식(4백년 동안 사람들은 커피 콩을 씹었다)과 음료가 되어왔다. 그러나 1800년에 프랑스 비긴이 생기기까지 커피를 끓일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그동안에 커피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들에서는 분쇄한 커피를 물에 넣고 그냥 끓인 후 자기들이 만든 필터 사이로 이것을 따라서 마셨다. 분쇄한 커피 봉지 포장에는 커피를 '냄새가 좋을 때' 까지 끓이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간단하기는 했지만 비긴은 환영받는 도구가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약사 데크로와지으가 발명한 비긴은 두개의 날씬한 철제용기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 구멍이 있는 판, 즉 필터가 있었다. 1850년경에 프랑스 제작자들은 최초의 자기 애나멜 비긴을 선보였다.

 비긴을 최초로 미국식으로 만든 제품이 1873년에 특허를 얻었다. 방이 하나밖에 없는 실린더에는 뜨거운 물과 커피가루를 용기 밑바닥까지 압착할 수 있는 필터가 붙어 있었다. 불행하게도 필터가 용기 벽과 꼭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찌꺼기가 떠 있는 커피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찌꺼기 문제로 너무나 짜증이 난 한 여성이 더 나은 커피 제조기를 만들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멜리타

 1907년에 독일 멜리타 벤츠 부인은 커피포트의 두개의 방 사이에 놓을 여러가지 물질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면으로 된 천을 동그랗게 잘라서 포트의 철제 필터에 놓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았지만 곧 천이 찢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책상에 있는 잉크 흡수지를 잘라서 거의 완벽하고 단단하면서 기공이 많은 종이를 1908년에 만들었다. 그리고 멜리타 필터 시스템을 상용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모든 종류의 커피포트 판매가 너무 느렸다. 그래서 제작자들은 1920년대까지 인기를 끌었던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그것은 한 가지 기구에 여러가지 기능을 합쳐놓는 것이었다. 가장 뛰어나고 성공적인 예가 암스트롱 회사에서 만든 퍼코 토스터(Perc-O-Toaster)였다. 그 기계는 빵을 굽고, 와플도 굽고, 커피도 끓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은 퍼콜레이터(percolator) 부분이었고, 20세기 전반기에 다른 모든 타입의 커피포트를 제치고 시장을 독점했던 기계는 바로 퍼콜레이터였다.

 

파이렉스

 현대의 뿌리를 찾고 있는 어원학자들은 파이렉스(pyrex)라는 내열강화유리의 이름은 '벽난로'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이라(pyra)'에서 나왔으며, 제시 리틀튼은 이 말을 자신의 파이렉스에 붙였다고 한다. 이 주장이 논리적인 것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파이렉스라는 유리의 이름은 '파이(pie)' 라는 단어를 통해 훨씬 더 소박한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코닝 유리에서 최초로 만든 파이렉스는 둥근 9인치짜리 파이 접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파이렉스에 얽힌 이야기는 파이가 아니라 케이크에서 시작한다.

 1913년 어느 날 아침, 제시 리틀튼 박사는 뉴욕 코닝에 있는 코닝 유리회사의 자기 실험실에 초콜렛 케이크를 가지고 출근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케이크를 권했다. 사람들은 먹으면서 맛있다고 했지만 '아침에 웬 케이크?' 하고 의아해 했다.

 리틀튼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리 그릇에다 요리를 할 수 있다고 했을 때 자네들이 웃었지. 그래서 직접적인 증거를 가져왔지'. 그 전날 밤, 리틀튼은 유리 반죽 그릇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아내에게 거기다 케이크를 구우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부식성이 없고 열처리가 된 유리는 19세기 말 독일에서 개발되어 이미 여러가지 산업에 응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리틀튼 이전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요리기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코닝은 1916년에 파이렉스 오븐그릇을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했다. 그리고 과학적 회의론자들에게 열처리 유리 능력을 납득시키기 위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다 최초의 광고를 냈다. 유리에다 케이크를 굽는다는 신선한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사람들은 1919년 한해 동안에 450만 개 이상의 파이렉스 제품을 샀다. 초기의 제품이 두껍고, 무겁고, 색이 약간 변하고, 머리카락 같은 내부 균열과 거품 때문에 손상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요리에는 굽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틀튼은 파이렉스가 조리기구의 주된 경쟁자가 되려면 스토브의 직접적인 열을 견뎌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0년 이상이라는 기간 동안 기술자들은 급속 공기 냉각, 찬 오일에 담그는 것 등 유리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실험했다. 수많은 실패를 한 후 그들은 유리 자체의 성분을 약간 바꾸는 기술을 개발했다. 끈기 있는 테스트가 몇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동안 코닝 과학자들이 유리그릇에다 삶고 튀긴 감자는 무려 1만 8천 파운드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1936년에 코닝은 불에 견디는 파이렉스 제품을 발표했다. 이제 유리 그릇이 오븐에서 굽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불에다 놓고 요리하는 데까지 사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열처리와 불꽃처리된 그릇 완성은 더 큰 기술적 도전의 발판을 놓아 도자기와 같은 외모와 감촉을 가진 깨지지 않는 식기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수년 동안의 실험과 수많은 접시를 깨뜨린 끝에 이 제품은 '코럴 웨어(corelle ware)' 라는 이름으로 1970년에 출시했다.

 

 전자레인지

 마이크로웨이브를 이용해 요리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직립인간인 호모에렉투스가 150만년전에 불을 발견한 이래 처음으로 등장한 전혀 새로운 조리 방법이다. 이러한 주장은 마이크로웨이브를 이용한 조리는 불이나 불의 요소가 음식에 직접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순수한 전자기 에너지가 음식에 있는 수분 분자를 활성화시키고 요리에 필요한 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이크로웨이브 에너지를 생산하는 전자 튜브, 즉 마그네트론은 전자레인지가 탄생되기 십여년 전부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영국의 버밍햄 대학 존 랜달 경과 부트 박사의 발명품이었다. 두 과학자의 관심은 칠면조를 굽는 것이 아니라 나치의 야심을 요리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마그네트론은 2차 대전 기간 동안 영국 레이더 방어망에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웨이브의 내부 열로 요리를 한다는 생각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그것도 순전히 우연한 기회에 생겨나게 되었다.

 1946년 어느 날 레이시온 회사의 기술자인 퍼시 스펜서 박사는 마그네트론 튜브를 테스트하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초코바를 꺼냈다. 그는 초코렛이 부드럽고 찐득찐득하게 녹아서 엉망이 된 것을 발견했다. 마이크로 웨이브가 열을 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초코바가 튜브에서 새어 나오는 방사열에 가까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은 아무런 열기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더러워진 바지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는 옥수수를 사오게 해서 튜브 근처에다 놓았다. 그러자 몇 분 내에 옥수수 알갱이는 익어서 튀기 시작했다.

퍼시 스펜서

 다음날 아침 스펜서는 날계란 한 다스를 실험실에 가져왔다. 그는 그릇에다 구멍을 뚫고 계란 한 개를 속에 넣어 구멍을 마그네트론과 일치시켰다. 호기심 많은 동료 한 사람은 너무 가까이 몸을 숙이다가 계란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는 계란이 속속들이 익었으며 압력 때문에 껍질이 터진 것을 깨달았다. '계란을 재래식 방법이 아닌 마이크로웨이브로 이렇게 빨리 요리할 수 있다면 다른 음식은 왜 안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스펜서는 했다.

 

 레이시온은 상품으로 전자 레인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내에 레이더 레인지를 내놓았다. 이것의 실제 조리 공간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외형은 냉장고만 했다. 레이더 레인지는 초소형화 시대가 도래가기 전에 모든 전자제품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제품 부피는 대부분 진공관, 냉각팬, 해파리처럼 얽힌 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몇 레이더 레인지가 식당에 팔리긴 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이 제품은 그다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1952년이 되어서야 가정에서 가정용 전자 레인지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타판 회사에서 만든 오븐은 두 개의 조리속도, 스위치, 21분 짜리 타이머가 부착되어 있었는데 소비자 가격이 무려 1,295불이나 되었다. 이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타판 오븐과 나중에 나온 핫포인트 모델은 50년대가 계속되는 동안 줄곧 가전제품 전시회에서 전에 없는 인기를 누렸다. 미국 가정의 대부분은 아직 마이크로웨이브로 조리하는 것을 꺼렸지만 오븐 판매는 해가 갈수록 늘어나서 지금까지도 팔리고 있다.

반응형